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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재 할매 - 홍억선

Joyfule 2015. 11. 27. 16:25

 

 

할매

 

꽃재 할매 - 홍억선

 

 

 살긴 내가 참 오래 살았지. 아흔을 넘긴 지가 벌써 얼마인가. 그래도 안 죽는 걸 어째. 에미하고 애비는 내 명이 모질다고 하겠지만 숨이 안 떨어지는 걸 인력으로 어쩔 수가 있나. 그래서 이렇게 아침 바람에 바깥 출입이라도 나서는 기 서로간에 수월치. 상늙은이하고 중늙은이가 종일 방바닥만 쳐다보고 앉았으면 뭐해. 남들이사 욕을 하겠지. 그래도 내사 토굴 같은 방구석에 죽은드끼 누워 있는 기 싫어. 숨을 쉬는 단에는 사람 새 섞여 있어야지. 늙었다고 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사노.

 

 거기다가 하루 한 때씩 바깥에서 줄이는 기 어데고. 관에서 돈을 대 밥이 나온다 카던데 별별 끼 다 나오더라고. 집에 있어 봐야 아적에 먹던 된장이나 대충 더파 가지고 한 술 뜨는 둥 마는 둥 할 낀데. 하여튼 거기서는 가만 앉아 있어도 심심찮애. 사시사철 방 뜨시지, 더운 물 술술 나와 수시로 목욕을 해도 누가 뭐라고 하나. 그러니 늙은이들로 온통 모종을 부어 놨어. 내가 요새 낙이라곤 거기 댕기는 거 밖에 없는 택이지.

 

 그런데 글쎄 애비가 노는 차로다가 쪼르르 실어다 주면 내가 큰 덕을 볼텐데 그걸 안 해 주니 내가 아침마다 이렇게 힘이 드는 거 아이가. 이쪽 길이 질러가는 길인데도 니 한번 봐라. 저 높은 산만디까지 계단이 몇이나 되겠노. 한 백 계단은 되겠제. 늙은다리가 허방질을 해가며 올라가는 줄 뻔히 알고도 당최 너거 애비는 덕을 안 비주는구나. 이 길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다 보면 지나온 옛날 생각이 나고 해서 서운한 맘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무릎이 아프다고 몇 번을 졸라도 들은 척을 하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 그제서야 병원에 데리고 가는 시늉을 하더라만 병원엘 가도 의사란 놈이 '할매요, 너무 많이 써먹어 그래요. 어데 꿈쩍거리지 말고 집에 가만 들어 앉아 쉬이소'그 따위 소리나 해 대니 그기 말이 되는 소리가. 언제던가 너거 에미 목덜미가 어떠네 할 때는 며칠씩이나 집을 비워 가며 큰 병원으로 들락날락거리고 약을 포대기로 쌓아놓고 하더라만.

 

 회관 일만 해도 그렇지. 다른 자식들은 수시로 빵봉지도 사다 나르고 어떤이는 떡을 몇 말씩이나 해서 조상 얼굴을 드러내는데 맨날 얻어먹는 나는 얼마나 낯이 바시겠노. 그저 드문드문 한 번씩만 인사를 해도 내가 사람들한테 대우가 달라질 낀데. 아니 그건 둘째치고 오다가다 차에 친다고 아예 나댕기지도 마라 하니 그기 날 위하는 기가.

 

 어제만 해도 그래. 내사 회관에 가도 상늙은이라 그저 뒤에서 무던히 앉았다 내려오곤 하는데 어제는 글쎄 사람이 없었던지 자꾸 나를 화투판에 불러들이잖아. 할 수 없이 십원짜리 민화투판에 더듬더듬 끼긴 했는데 먹을끼 없고 낼끼 없으면 한 순배는 그저 손에 쥐고 돌아가는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눈이 희미해 짝도 못 맞추는 수도 있고 다들 그러잖아. 그런데 고놈의 할마시가 자꾸 때때거리면서 따지고 부애를 얼마나 지르는지 어째 손을 내지른다는 기 그놈의 할마시 눈티에 맞아 소리를 지르고 난리 야단이 났었지. 그러면 보통 거기서 대충 끝낼 일이지 집까지 쫓아와서 노망을 했다는등, 회관에 보내지 마라는 둥 애비한테 온갖 해악을 퍼부어 대는 건 뭔 경우고. 뭐든 어지간히 하고 넘어가야 맞는 일인데 가만 들어보니 아 글쎄 애비가 연신 허리를 꺾어가며 그놈의 할마시 비우를 맞추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우동까지 시켜주면서 아주 기를 살려주고 그러더라.

 

 이래저래 암만 생각해도 나를 두고 아주 뭉갤려고 작정한 것 같애. 집에 있으나 어딜 가나 그저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늙은이는 구석으로 밀어낼라꼬 온갖 난리를 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서기나 해? 내가 당장 고갤 숙여 봐. 그 날로 그만 떠밀리는 목숨이야. 뭣 때문에 사는 날까지 기를 꺾어가며 살아.

 

 생각해 봐라.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것도 그저 공으로 있는기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에미나 애비는 지킨 거 밖에 없어. 너거 할부지가 갈퀴 손이 되어 다 일구어 놓은 거 아이가. 그러니 내가 지금까지 살아도 어째 공으로 먹고 있다카겠노.

 

 그건 그렇고. 이렇게 산만디에 올라서니까 시원하게 저 아래가 다 보이지? 저기 강물 좀 봐라. 저 놈의 강은 어째 저래 한결 같겠노. 십 년 전이나 이십 년 전이나 한날 한시 같네. 내 맘이 똑 저래. 오래 살았다곤 해도 그저 잠시 한 숨 자고 나온 것 같은데 세월은 어째 이리도 쏘아 놓은 화살 같겠노.

 

 그래 니는 오늘 올라가야제. 가거든 잊어버리지 말고 아까 말한대로 다리 아픈 약이나 퍼뜩 지어 보내거라. 당최 다리가 시큼거려 살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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