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에서 - 한복용
지난 8월엔가 이사를 했으니 벌써 석 달째다. 집을 보러 왔을 때, 아파트는 낡을 대로 낡았고 집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냄새의 발원이 창 너머 강이라는 걸 잠시 후 알게 되었다. 망설였다. 이렇게 냄새 나는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수 년 전 양주시의 D아파트에 살 때도 그랬다. 아침 공기를 맡으려 창문을 열면 돼지농장에서 풍겨오는 악취에 놀라 급히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햇살이 좋아도 그 집 베란다에는 빨래를 널 수가 없었다. 냄새가 날까봐 외출 전에는 옷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여기도 새벽공기를 맘 놓고 맡을 곳은 아닌 듯했다.
전망은 좋다. 왼쪽으로 멀리 소요산이 보이고 맞은편으로는 왕방산이 누워있다. 그 안으로 동두천시가지의 오밀조밀한 건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크고 작은 건물 숲을 지나면 바로 도로가 보이고 그 다음은 아파트 가까이로 강이 흐른다. 되었다. 그래, 이것으로 된 것이다. 나는 황급히 현관에서 바라다 보이는 야경을 상상하며 집 계약을 하였다.
세를 주고 사는 집이지만 사는 동안은 내 집이니 몇 군데 손을 봐야 했다. 도배와 장판을 새로 했다. 본드냄새가 진동해 사나흘 현관문과 베란다 문을 열어두었다. 가구와 가전제품이 제 자리를 찾으니 그제야 내 집처럼 느껴져 일을 마치면 당장 달려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보통 두세 켤레의 신발이 나를 반긴다. 어떤 신발은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어떤 신발은 하루에 한 번씩 자리가 바뀐다. 신발장이 바로 옆인데도 넣게 되지 않는다. 신발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빈 현관이 허전하기 때문이었다. 불 꺼진 집에 들어와 나란히 놓인 두세 켤레의 신발을 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혼자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나는 동두천시의 야경을 불을 켜지 않은 채 현관에 서서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베란다에서 보는 야경과는 감상의 구도가 다르다. 얇은 커튼너머로 내다보이는 현관에서의 야경은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황홀하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야경을 여기에 견줄까.
어떤 땐 현관 옆 식탁의자에 앉아 실내등을 끈 채로 시가지의 보석 같은 불빛을 본다. 가끔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밤을 샌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오는 아침불빛을 맞으며 하루를 준비하기도 한다.
저녁밥을 짓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창 너머 동두천중앙역을 바라본다. 소요산 방향으로 가는 열차가 선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하루를 긴장 속에서 보낸 가장들이 바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앙역 계단을 내려온다. 그들 중에는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포장마차로 들어가 어묵 한 사발에 소주 한잔을 들이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붕어빵 한 봉지를 사들고 한 입 베어 물고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탈 것이다. 몇 명이 열차에 오르고 또 몇 명이 그곳에서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떠나는 이가 있으면 다시 그곳에 찾아오는 이가 있다는 것이 현관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신발을 벗지 않은 채 물끄러미 현관에 놓인 몇 개의 신발을 바라본다. 굽이 닳은 단화가 유난히 아프게 와 닿는다. 몇 년을 바쁘게 나와 함께 한 신발이다. 화원 일의 특정상 뾰족구두는 불편하다. 일이 많을 때에는 일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발에 대한 혹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대부분 발이 편하고 일하기에 지장이 없는 단화를 신게 된다.
그런데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단화를 신은 게 몇 번인가 싶다. 일감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 신발이 불편해서도 아니다. 굳이 단화를 신지 않아도 일에 지장이 없음을 알았던 때문이다. 발에 멋을 내도 충분히 좋았을 것을 꽃일은 거친 일이라고 앞서 생각하며 편안한 신발만 고집했다. 지금 단화는 현관에서 쉬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에게 잠시 휴가를 내주었다. 신발장으로 들어가 앉아 캄캄한 곳에 오래도록 있는 게 아닌, 늘 있던 그 자리에서 잠시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신호를 주면 불끈 일어 설 모습으로.
현관 앞에서 전신거울을 통해 나를 본다. 키가 자라다가 만 사람 같다. 근래 들어 부쩍 살이 붙은 몸을 눈으로 천천히 더듬어본다. 살이 붙으면서 날카로운 인상은 다소 사라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긴 얼굴이다. 좀처럼 지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이 얼굴이, 아니 이 사람이 맘에 든다. 웬만한 일에 엄살 부릴 줄 모르고 흐르는 변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일 줄 알며 마음이 가 닿지 않는 일 앞에서는 흥정조차 하지 않는 여자. 이 여자는 저 작은 몸으로 참으로 많은 고비를 잘도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젠 두렵다거나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다. 힘들었지만 비교적 복 받으며 산 셈이다. 주변에 좋은 분들이 나무처럼 곁에 서서 그늘이 되어 주기도 하고 바람을 실어오기도 했다. 아무나 얻는 축복이 아니다. 누구에 의해 살아진다는 거,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혼자 있되 혼자가 아닌 나는 현관 앞에 놓인 신발을 바라본다. 뚜벅뚜벅 지금처럼만 걸어가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들이 내게 응원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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