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I. 머릿말
그리스도교 신앙은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그 어떤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역사를 뚫고 들어와 일어난 실존의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 문화속에 들어오셨듯(Incarnation),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또한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아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접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기구로서의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역시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특수상황속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서구 교회를 필두로 시작된 미국 교회와 그외의 나라의 선교활동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것을 다시 국내에 정착된 교파(Domination)에 촛점을 맞춰 심도 깊은 연구를 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때(kairos)와 문화적 제약성으로 인한 문제점을 살피고,
이러한 복음과 문화의 이중구조속에서 형성되어진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서구(유럽) 교회의 선교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결실을 남기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다가 지나가고 말았다.
서구형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파형의 미국적인 기독교와는 달리 국가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있어서
교회의 유기적인 연결과 결속면이 강조되고, 따라서 공동체의 신학과 교회론적인 신앙의 의식이 훨씬 강했다.
이렇게 한국선교를 시도했지만 언제나 바닷가만 지나간 서구교회의 선교에 대해,
선교사들의 모습과 실패의 원인,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교사들 먼저 벧트브레(John.J.Weltvree)와 하멜(Handrik Hamel)은
서양의 사람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으나 한국의 기독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 바질 홀(Basil Hall)
1816년 서해안 측량을 목적으로 배를 탔으나, 그해 9월 1일 황해도 백령도, 청도 근방에 상륙하여
물품과 한문 성서를 나누어 주었고, 군산으로 가서 관리들을 만나 선물과 성서를 전했다.
전라도 다도해 근방을 10일간 순항하면서 추자도에도 상륙하였다.
2) 칼 구츨라프(karl A.F. Gutzlaff)
프랑스 신부 바텔레미 브루지에가 최초의 한국 신부로 임명받던 1832년에
한 사람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도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의 이름은 칼 구츨라프이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으로 상로 탐색차 황해연안을 답사하러 왔던
전(전)네델란드 선교회(The Netherland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서구교회의 선교사였다.
그는 모리슨의 영향으로 동양에 눈길을 돌렸고, 중국에 와서 사이암어로 신구약을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들러 충청도 홍천 길대도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성서를 나누어 주었으나,
상륙은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얼마 안되어 광명한 날이 한국에 임할 것을 소망했다.
그는 선교사다운 열의와 함께 상역(상역)과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이양선(이양선) 문제에 대해서는 근대사에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3) 로버트 토마스(Robert J.Thomas)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1840년 영국 웨일스의 라야더 (Rhayader, Radnoshire)에서 태어나서
런던 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ge University of London)를 졸업하고,
1863년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한 상해의 런던 선교회 총무인 무어헤드(Wm. Muirheard)와의 불화로 선교사 사직원을 제출하고
세관에서 근무하다가 조선인 동지사 일행을 만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알렉산더 월리엄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에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한국말을 배우고 성서를 나누어준 뒤 북경으로 돌아간다.
얼마후 제너럴 셔만호(General Sherman)에 편승하여 1866년 8월 대동강 입구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함으로 결국 모든 선원이 살해되고,
토마스 목사는 칼로 그를 치려는 사람에게 성서를 주려했으나,
받지 아니함을 보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다가 순교하였다(1866. 8. 3).
토마스 자신의 행동과 선교방법론에는 엄연히 서구적인 교회신학이 그 기초가 되고 있었다.
4) 알렉산더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1866년 스코틀란드의 장로교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한국인 상인들과 그리고 동지사 일행을 만나 그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그는 토마스 목사 순교후에 한국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만주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고려문에 와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성서를 팔았다.
또한 한국 선교에 대한 열의로 해서, 한국에 대한 서구 기독교 여러나라의 무력 간섭을 꾀하였고
그 무력의 시위로써 개국을 강요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5)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스코틀란드 선교사인 존 로스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1872년 만주에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때마침 의주 청년들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를 만나 신문화를 가르쳐주고 한국말을 배웠다.
그들은 1875년에 성서번역의 대업을 착수했으며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1883년에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884년에 마태복음이 발간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마침내 신약전서가 번역, 간행되었다.
2. 실패원인과 의의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되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그 이유는 서구형의 교회 생리가 기독교국(Christendom)의 관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되는 한 로마 카톨릭과의 형태적 동일성이 두드러졌고,
그에 따라 시대적으로나 교회론적으로 조선풍토에 도입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여러모로 단절된 순수한 형태의 복음,
소위 복음주의적이고 부흥회 타입의 교파적 교회에서 가능성이 열릴수 밖에 없었다는 필연을 가진다.
이렇게 한국정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성서를 보급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닦은 점에서
한국교회사 최초의 장(page)에서 길이 빛날 공헌을 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이응찬, 서삼륜과 함께 한국말 성서 번역을 한 것과
그들과 관련된 한국인 전도자들을 한국 민족 교회사의 첫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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