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3.(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4. 한국내 프로테스탄트의 교단 형성 과정.
위에서 1910년 이전 국내에 선교를 개시한 각 교파 선교를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내에 들어 온 개신교회는 철저한 교파형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각종 교파 선교부들이 다른 교파 선교부들과의 연합이나
대화 없이 독자적으로 한국선교를 실시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교파적 종교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 개신교회는 그 초기부터 선교의 주체가 되는 선교부 및 선교사에 의해 성격이 규정되는
교파형 교회로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선교작업의 연결에서 교단형성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1) 장로교.
한국에 선교한 장로교회는 미국의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4개 장로교회였다.
이들 네 장로교회는 본국의 해외선교부 조직 밑에 한국선교회(The Korea Mission)를 두어
선교사업을 추진케 하는 한편 한국 안에서의 다른 선교회 선교부와 연합전선을 펴 나갔다.
1889년 이같은 장로교 선교부 연합조직이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북장로회 선교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가 연합하여
<미국 북장로회선교 및 빅토리아 선교 연합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약칭 장로회 공의회로 알려진 이 조직의 초대 회장은 헤론이었고, 서기는 데이비스였다.
약칭 장로회 공의회는 1890년 데이비스의 사망으로 자연 폐지되었고
1893년에 이르러 남장로회 선교회와 연합하여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공회>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의 설립목적은 "조선지에 갱정교신경 장로회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를 설립" 하는데 있었다
(조선지 갱정교신경 장노회정치 사용 련합교회 설립).
처음에는 미국의 남북장로교 선교회만으로 이루어졌으나 캐나다 장로회 및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에서도 가입하게 됨으로 명실공히 선교연합 협의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을뿐 정치적 기능은 사실상 없었다.
이 조직이 정치적 기능을 갖게 되기는 1901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로 조직을 확대하면서부터 이다.
이 공의회는 비로소 한국인도 그 회원으로 참석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01년 초대 공의회 회원에는 1900년 장로로 안수받은 김종섭과
1910년 장로 안수를 받은 길선주 방기창, 한국인 조사 6명이 참여하였고 선교사는 25명이었다.
이 공의회는 다시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로 구분되었고
교회자치권은 <영어를 사용하는 회>에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공의회 안에 두 종류의 소회를 두어 가던 중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에서
모든 선교회를 통괄하여 처리할 수 있는 자유 장로회 설립을 건의하여(1902),
이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준비작업을 거쳐 1905년 각 선교회는 본국 교회에 독립된
하나의 장로회 설립을 요청한 바 각 선교부는 <조선연합 자유 장로회> 설립을 승낙하기에 이르렀고,
1907년 마침내 한국인 7명이 목사로 안수받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 (일명 독노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독노회는 1912년 7개 노회로 발전 분립되면서
비로소 교단조직이랄 수 있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된 것이다.
2) 감리교.
감리교의 경우는 장로교보다 훨씬 늦은 속도로 교단 형성이 이루어졌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1885년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한국선교회> (The Korea Mission)를 통해 선교 및
치리기능을 행사하였고, 이것이 1905년에야 <한국선교회> (The Korea Mission Conference)가 되었으며,
1908년 비로소 <조선 연회> (The korea Annual Conference)가 되어
사실상 독립된 교회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남감리회는 1897년 한국선교를 개시하면서 <한국선교회>를 조직하여 중국 연회의 관할 하에 두었고,
1914년 비로소 <조선선교연회>가 되었으며 1918년에야 <조선연회>가 되었다.
장로교회와 같이 공식적인 선교회 연합기구는 갖지 못하고 있었으나,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을 통해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던 남북 감리회는
1924년부터 두교회 합동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1930년 12월, 마침내 통합된 교단 조직인
<기독교 조선감리회>라는 총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3) 성결교.
교회조직보다는 순수한 전도에만 주력했던 '동양선교회'는
조직없는 선교단체가 크게 성장할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1년까지의 15년간 교회수는 불과 33개 밖에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양선교회의 탈바꿈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동양선교회는 그 이름을 1921년 9월에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로 바꾸고
길보른 총리가 한국 감독과 경성성서학원 원장직을 겸직하면서 본격적인 교회조직을 하게 되고
교리도 확장하게 된다.
1929년 감리교회 조직을 본 딴 <조선연회>를 다시
1933년 4월에는 "조선성결교회총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4) 침례교.
펜위크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는 1906년 미국북침례교의 엘라딩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인수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이 교단 이름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하고 1933년에는 다시 "동아기독대"로 바꾸었다가
1940년에는 "동아기독교"로 변경시켰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국을 그들의 선교지로 분할하자 펜위크는
"대한기독교"의 선교지역을 국외로 과감하게 옮겼다.
그리하여 그는 만주일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몽고에까지 선교한 것이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동아기독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교단은 강제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에는 1949년 총회에서 미국 남침례교와 관계를 맺고
비로소 그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 침례회"라 고치면서 침례교단으로 출발하기에 이른다.
5) 그 밖의 교회들.
구세군은 1910년 10월 한국인 21명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으로 처음 임관됨으로 구세군 총회를 그해에 조직할 수 있었다.
1918년부터는 구세군 특유의 사회 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주로 본영보조와 독지가들의 헌금과 그리고 정부의 보조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12월부터 유명한 "자선남비"가 등장한 것이다.
1928년 시작된 자선남비 전통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구세군이 있는 나라마다 계속되고 있다.
성공회는 선교시작 때부터 한국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로 코르프 신부를 임명하였고,
처음 선교 시작할 때에는 <대영종고성교회(대영종고성교회)>란 조직하에 선교하다가
후에 <조선성공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성미가엘 신학원을 개원하고 1916년 5월에는 교구회가 조직되고
조선성공회의 기본교리와 전례에 관한 선언이 있었고 헌장 법규도 제정하였다.
1941년 외국선교사들의 신사참배문제로 강제 추방당하였으나 해방과 더불어
세시주교의 귀환으로 조선성공회가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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