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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2.(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Joyfule 2025. 2. 11. 16:48




교회사 2.(초기한국교회의 신앙형태)

III. 정착된 프로테스탄트교회 유형  

1.미국 교파형 교회선교.  
1) 미국 북 장로교.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중에서 처음으로 주재 선교사를 파송한 영예를 가진 교회는
미합중국 북장로교회 였으며, 한국에서 체재하면서 일한  최초의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알렌(Horace Newton  Allen 안련 1858 - 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1883년 10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지내던 중 중국 산둥성 주재 미국 선교사 레이드가
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회고하자 한국으로 갈것을 결심하였다.  
알렌은 1884년 6월 22일 서울에 들어왔으나 선교사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미국 영사관의 공의로 일하면서 전도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민영익이 상처를 입었으나 알렌의  의술로 치료하여 왕실의 시의관으로 임명되고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정하게 되어 미국 선교사의 선교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후 1885년 4월 5일 복음 선교사로 언더우드가 들어오게 됨으로서 본격적인 선교가 추진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는 해방전까지  300명의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에서 장로 교회가 가장 큰 교세를 차지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2) 미국 남장로교.  
미국 장로회의 외지 선교는 1861년까지는 단일  사명으로  추진되었으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장로회가 따로 조직됨으로 외지  선교도  갈라지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외지 선교회의 목적은 '기독교의 전파와  교회의 조직'이라 하였다.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북장로교회보다 8년 늦게  시작 되었다.  
그것은 1891년 10월에 안식년으로 귀국한 언더우드가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선교를 위한
신학교 협의회에서 조선선교를 호소함으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데이트(L.B.Tate),  존슨(C.Johnson),  레이놀즈(W.D.Reynolds)등이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2년 내한하였다. 
이것이 남장로교의 한국교회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후 그들은 최초의 선교지부를 전주에 세웠고 1898년 목포에 지부를 세웠다.
따라서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 남서부지방은 사실상 한국에 온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남장로교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선교하였는데 해방전까지 178명이 내한하였다.  

3)  미국 북감리교.  
미국 북감리교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 정식선 교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선교부 개설은 그보다 1달 늦게  내한한 스크랜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펜젤러는 부인과 함께  왔다가  국내사정이 어수선하여 일본에 갔다가 두달 후에 다시 내한하여서  
1886년 배재학당을 세우고 교육사업과 함께 성서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스크랜톤은 1885년 5월 3일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서 병원사업으로부터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 학당을 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을 시작한 공로를 세웠다.  

4) 미국 남감리교.  
남감리교의 한국선교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1887년) 후
미국에 유학하여b 남감리회 본부에 한국선교를 요청했던 윤치호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한국선교는 1895년 10월 13일 중국에 있던 리드(C.E.Reid)가 내한 함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남감리회는 서울과 개성 및 춘천 이북의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2. 그외 교파형 교회의 선교   

한국선교에서 비록 미국계의 교파는 아닐지라도
교회의 이해에서 교파적 형태의 신학을 취하는 교회의 선교가 여럿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교회는 다음과 같다.
 1)  호주 장로교.  
미국에 이어 그 다음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한 선교회로,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해외 선교회였다.
1889년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es)목사와 그의 누이동생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열은 왕성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삼아 선교하면서 한국선교에 체계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너무나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한 것이 무리가  되어서 병약하던 중
아깝게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입국한지 1년이 되어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호주 전체 장로교회에서 한국선교에 대한 열기가 높아져
이후 해방 전까지 77명이  내한하여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호주교회는 경남지방에서 농촌교회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2)  영국 성공회.  
영국 성공회(The sowety for Propaagation  of  the  Gospel  in  Forignparts 약칭 S P G) 는
영국 해군 군목이던 코르프 (C.J.Corfe) 신부를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한국 주교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9월 29일 내한함으로 성공회의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성공회의 한국에서의 첫 교회는 1891년 5월 17일에  서울  충무로(지금의 대연각 건물이 있는 지역)에
선교본부와 함께 성당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부활의 집"이라 하고 공동생활을 개시했다.  
초기의 선교방법은 엄격한 청빈과 기도생활을 하면서 서울과 인천에서 의료사업과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 및 출판을 통한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
동시에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성서 번역사업도  연합적으로  진행시켰다.
그리고 선교초기부터 성공회는 한국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 내리려는 열망으로 "토착화"에 힘썼으며,
한국학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914년 4월에와서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기관인 성 미가엘 신학원을 개원하고,
1915년 12월 21일에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김희준씨가 서품되었다.

3)  캐나다 장로회.  
캐나다의 한국선교의 시작은 특수했다.
캐나다인으로서 처음  한국에  온 사람은 맥캔지 목사 (William John McKenzie, 1861 - 1895)였으나
그는  그 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한 열정의 청년이었다.
1893년 12월에 오직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안고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으로 선교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몇달을 보낸 뒤 벽촌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례와 함께 생활을 하였다.
청일 전쟁을 앞둔 시기에 그는 한때 일본을 위한 정탐군으로 오인되어 신분이 위태로워진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 하였다.
맥켄지 목사가 가는 곳곳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한 다음에
다른 집과 구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한국 북부지방에서 십자가 표식으로 교회당을 구별하는 방법이 퍼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성심성의껏 그리스도를 전한 생활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그는 너무나 피로한 몸에 일사병까지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895). 
이 죽음이 계기가 되어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정식 한국선교를 결의하였고
이에 1898년 9월 그리이슨(R.Grierson), 푸트(W.R.Foote), 맥레(D.M.Mcrae)등이 내한함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1925년 본국에서 감리교회등 다른 교파등과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회가 된 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의 활동무대는 함경도와 간도지방이었다.

 4)  침례교회.  
침례교회의 한국선교는 펜 위크(Malcolm C. Fenwick)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Toronto) 출신으로서 선교를 위해 내한할 때
아무런 선교기관의 배경이 없이 개인자격으로 왔다(1889년). 
그는 서울에서  10개월 정도 우리말을 공부하고는 황해도 솔내에서 자리잡고
그 곳 주민들과  의식주를 같이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많은 개종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도에 힘쓰다가 재정문제로 한국선교를 중단한 미국 침례교 계통의
엘라딩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흡수 하였으나,
이 지역(충청도 일대)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토인 한국사람들 자신이 지도하도록 하였다.
펜위크는 경험을 통하여 선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보다는
본토인 한국 사람들 자신에 의해 증거되어야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5)  러시아의 동방 정교회.  
1898년 1월 암브로시 신부가 내한하여 러시아 공사관 안에 성당을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했으나
공사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소극적 종교행위에  국한되었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까지 확장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노일전쟁(1904 - 5)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본국 귀환을 거부한 선교사들에 의해 정동에서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본국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남으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선교는 사실상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널리 시베리아 쪽에서는 가난 때문에 이민간 숱한 우리 조선 사람들이
러시아의 동방정교회에 입교하고 있었다.
얀치히(Yantchihe)라는 마을에서는 4백여 가구가 교회에 등록하고 있었으며
우리네 가난한  이주민들은 제정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교회에 입교해서
그 국민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고자 한 동기는 비탄한 것이었다.  

6) 구세군.  
민중 지향적 교회인 구세군은 1908년  10월에  영국인  선교사인  허가두(R.Heggard) 정령이 그 일행과 함께
서울에 와서 서대문 평동  96번지(지금의 고려병원 뒷쪽)에 자리 잡음으로 그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노방에서 전도하고 옥내집회는 허가두의 집에서 보았으나, 참가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한달 후 부터는 지금의 구세군과 새문안교회 중간에  서울  1영(교회)을 개척하였고,
이어서 12월에는 서울 제 2영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군복차림으로 노상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사람을 모은  다음에 열심으로 전도하였다.
한일 관계가 험악한 그 시절에 군복 차림  때문에 오해를 받아 종종 변을 당하기도 하였고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1909년 구세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주력을 하였으며
1910년에는 서울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본영(본영)을 확립하였고
구세군  본래의 사명인 빈곤과 사회악을 제거하는 일과 또한 복음의 전달을 위하여
적극적 공헌을 사회를 위해 남기기 시작하였다.  

7)  성결교회.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었다.
다만  초교파적인 동양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경화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성결교는 1907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두 선교사, 즉  김상준과  정빈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상준과 정빈은 일본 동양선교회(The Orient Missionary Society)가 경영하는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무교동에 집  한채를  매입하여 복음 전도관을 개설하여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교파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악대를  동원한 노방전도와 호별방문을 통한 전도로 얻은 결신자들을
인근 교파  교회로 인도하였다. 
1901년 일본에서 설립된 동양선교회는 그 설립목적을  동양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전도표제로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하였다.  
이 전도표제는 매우 간결하여서 대중전도 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성결교 선구자들도 그런 정신으로 전도만을 열중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기구의 조직이 불가피한 정도로 신도의 수가 확장되자 교단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1년 9월에는 정식적으로 성결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김상준과 정빈이 무교동에서 전도하기 시작한지 3년만에
영국사람 토마스(John Thomas)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1921년 9월 동양선교회 창설자 길보른(E.A.Kilborne)이 서울에 머물렀다.
특히 길보른은 의사소통의  문제로인하여 감독제에서 고문제로 바꾸어 발전을 꾀하였다.
최초의 고문은  이명직, 이명헌, 부릭스부인등 세명이었다.
이들은 1911년 3월 서울 신학대학의전신인 경성성서학원을 세워 교직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1922년 축호전도를 경상남도에서부터 함남 혜산진에 이르기까지 실시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8)  일본교회.   
한일합방을 전후로 하여 일본교회의 한국선교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일본교회의 한국선교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이고,
둘째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이다.
당시 일본의 3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조합교회, 일본 메도디스트 교회,
일본 기독교회가 전자의 경우인 한국내 일본인을  위한  교회설립 및 전도활동을 모두 추진하였다.  
그러나 후자인 한국인 전도는 일본 조합교회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의 한국병합이 노골화되면서 합병이야말로 한일 양국국민의 행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며
이것을 '조선전도'의 기본정신으로 삼았다던 일본  조합교회내 의
극우파 에비나, 와다세는 1909년 4월 내한하여 한국선교 기틀을  잡았고
1911년 와다세의 한국 진출로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선교가 실현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추진된 조합교회의 한국전도는  1919년 이후
조선 회중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되기 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 외에도 1910년 이후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그리스도의 교회,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교회 등과 반선교사 운동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라 할 수 있는 자유교회, 자치교회, 하느님의 교회 그리고 한국
적인 신앙의 유산으로 이루어진조선 기독교회, 조선 복음교회, 예수교회 등 도
각기 교단 조직을 갖추고 해방전 복잡한 개신교회 종파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3. 1907년 대 부흥운동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구현한  대전환기적인 위치에 서있다.
특히 민경배교수는 1907년의 대 부흥은 신앙의 내연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외연 참여하게 된다는
신앙의 원형이 설정된 해로서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전환기라고 강조한다.  

1) 원인    
1895년 이후 한국교회내에 진행되는 민주주의적 자각과 그것을 믿고 나가는 교인들을 향해
교회의 비정치화를 선교사들이 외치게 되자 교회는  선교사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을 뿐 아니라
일부에서는 '반역자' 구실까지  한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좌절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국가의 비운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과
만약  선교사들이 계속 비정치화를 외칠 경우 오는 후유증을 염려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도를 통한 '성령의 힘'만이 해결점이라고 믿은 원산의 '하디'선교사는
선교사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었고 여기서부터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렇게 볼 때 1907년의 부흥운동이 외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이지만 
내적으로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경건주의적 신앙형태를 고수하기 위한
정교분리의  비 정치화가 근본 원인이다.

 2) 결과 및 평가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 결과가  평가되어  질수 있다.
첫째, 외적으로는 내연적인 신앙이 갖추어지면 그에 따른  외적변화는 자동으로 수반된다는 신앙의 원형설정과,
둘째는 좀 더 깊은 내적의미로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비정치화로 인해서 민족교회로서의 전통 약화이다.
이때의 부흥회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신앙 유형은 '부흥회적  열정'으로 특정지워지며,
미국 선교사들의 전 천년왕국설에 근거한 종말적인 타계지향의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