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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불편한 진실

Joyfule 2018. 4. 20. 00:53

 

기도에 대한 불편한 진실

 

필자의 지인은 50년이 넘게 새벽기도를 다니는 신앙이 돈독한 교인이다. 그러나 새벽기도만 성실하게 다니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필자의 돌직구를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동안 자신을 지켜오던 신앙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 성경의 근거를 조목조목 말해주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필자로서는, 지인과의 불편한 시간들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이참에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해 곰팡이가 슬고 눅눅해진 기도에 대한 진실들을, 장롱에서 꺼내놓고 화창한 햇볕에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네 교회에서 기도가 시들어가고 있는지 아는가? 그 이유는 기도를 해야 하는 목적이 점점 사그라져가고 있고, 기도응답은 얻는 이들이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교회가 기도를 열정적으로 했던 시절은 한국전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왔던 때이다. 그 시절은 먹고 사는 게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그래서 춥고 배고파진 사람들은 한줄기 희망의 빛을 움켜잡으러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녹이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신속하게 내려왔고, 얼굴이 환해진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식구들과 이웃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새벽마다, 밤이 새도록 자신들의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는 먹고 살만한 정도가 아니라, 자녀들을 유학 보내고 선진국의 문턱이 들어가는 OECD회원국이 되었다. 더 이상 기도할 목적이 없어졌기에, 간절한 태도도 더불어 사그라졌다.

 

그래서 아무리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기도하라고 소리를 질러대어도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그러자 대안으로 기도의 응답은 차치하고, 각종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만이라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 등의 기도회에 참석하라고 종용하고, 자신들의 요청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추켜세우고 있다. 그 결과로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교인이라면, 기도를 무척이나 잘하는 사람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면 격하게 반발하며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방식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아무리 교회에서 칭찬을 해주는 신앙행위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기도는 사람들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다.

 

기도는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과 교제하는 통로이다. 즉 성령과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려면 쉬지 않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기도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응답이 내려오게 하려면 희생의 강도를 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작정기도를 하고, 일천번제 기도회에 참석하고, 기도할 때마다 헌금을 가져오면 금상첨화이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금식을 하면서 희생의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기도의 태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분과 교제하고 싶은 자녀의 태도가 아니라, 부자 아버지에게 유산을 챙기려고 떼를 쓰며 억지를 부리는 불량아들과 무에 다를 게 있는가?

 

작금의 우리네 교회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찾는 교제의 습관으로 기도를 가르치지 않기에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한 시절에는 우리네 부모세대를 불쌍히 여겨 기도응답을 해주셨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탐욕을 채우는 기도로 변질되어 버렸기에 응답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이 사라진 교회에, 목회자들은 기도를 희생적인 신앙행위의 방편으로 삼아서 기도의 목적을 변질시켜버렸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시장한복판에서 기도하면서 자신의 드높은 종교심을 자랑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기도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드높은 종교심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던 예수님의 책망이 고스란히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 쏟아지는 이유이다.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기도는 무용지물이다.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120여명의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여러 날 동안 전심으로 기도하여서, 기적처럼 성령이 내려와 임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귀신을 쫒아내고 고질병을 낫게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채우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들어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네 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성령의 능력이 없다. 그래도 성령의 내주를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성령의 증거도, 성령의 능력도, 성령의 열매도 없는 기도는, 불가의 중들이 기도하거나 무당들이 굿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기도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성령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네 교회는 죄를 반성하지 않는 죄인들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하고 불행에 빠져 고통스럽게 살다가 지옥의 불길에 던져질 것이다.

 

기도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초대교회 사도와 지도자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들에게 자신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기도방식을 그대로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으로 능력 있는 제자들이 탄생하였는데, 그들이 빌립집사와 스데반집사 등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황제가 믿는 종교가 되면서 변질되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가르침을 후세에 이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작금의 우리네 교회도 기도회의 참석을 종용하지만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가르침에 무지하다. 그래서 형식적인 기도, 탐욕을 채우는 기도, 희생의 강도를 높이는 기도만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실 리가 없다. 그래서 교회는 더욱 형식적인 종교행위로 겉만 치장하고, 세상의 지혜와 인본적인 방식을 들여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다.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도,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되어 헐떡거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무능하고 무지한 교회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생수가 솟아나는 샘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신앙의 짐을 지어주어 영혼을 더욱 곤핍하게 만들고 있다.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