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일에 인생을 걸라.
축구선수라면 모름지기 축구하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학창시절부터 최소한의 공부만 마치면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방학에는 합숙훈련이나 시합이 예정되어 있어서 더 바쁘고 힘들다. 그렇게 초중고를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대학이나 프로구단에서 받아주는 선수들은 극소수이다. 나머지 선수들은 운동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아니, 학창시절 내내 축구에 올인한 선수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현실은 냉정하기 그지없다. 인생을 축구에 바쳤다고 해도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어디 축구선수만 그런가? 미술을 하거나 음악을 하는 이들도 그렇다. 어릴 적부터 번득이는 재능을 인정받아서 참가한 대회마다 상을 휩쓸고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탁월한 미술가나 음악가가 되는 것은 실로 어렵다. 그래서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의 반열에 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탁월한 성적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했고,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집념은 강해서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고 인생을 헤쳐 나갔다. 그러나 열정의 가속페달을 밟은 만큼 인생실패는 아주 빠르게 찾아왔다. 삼십대 초반에, 딱 한 번의 사업실패로 인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세월이 지나서 그 시절을 복기해보니까, 운이 좋지 못했다는 변명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인생은 연습이 없다. 일찍 실패를 하든 아니면 인생의 황혼까지 버티든지, 누구나 인생이 별개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땅을 떠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왜 인생이 실패뿐이며 허무하게 끝나는지 알려주는 이는 없다. 그게 인생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필자는 남들이 인생을 정리할 무렵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놀랍고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하고 싶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3)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이 그를 기쁘게 여기셔서 의인으로 여기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친구라는 호칭을 얻은 유일한 성경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만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다. 수십억 아니 수백억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얻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칭찬을 받았는지, 당신도 궁금하지 않으신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보여준 사건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과, 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렵사리 얻은 아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최강의 믿음을 보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의 행위와 비교해보자.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수많은 믿음의 행위들을 하고 있다. 수많은 예배의식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갖가지 교회봉사로 파김치가 되도록 살아가도 있다. 목회자들은 아주 인생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평생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칭찬과 축복을 얻어 누리지 못하는가?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13:1,4)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성경도 없었고, 신학이론을 가르치는 신학교는 물론, 목회자가 이끌어주는 교회도 없었다. 어떤 행위들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을 들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자 왕인 것을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이끄시고 지켜주실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가 어떤 빈도와 강도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의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친구로 인정하시며 그의 인생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동행하는 삶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1~4)
위의 구절은 베드로가 어떤 태도와 심정으로 기도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 끝에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을 경험했다. 그리고 새롭게 기독교인인 된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기도를 가르쳐서 성령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시작한다. 그가 전심으로 행한 것은 교회를 치리하고 상담하며 전도하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기도하는 일고 말씀사역이었다. 말씀사역은 지금의 우리네 교회처럼 성경공부와 설교를 하는 게 아니다. 당시는 신약성경이 없던 시절이므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3년반동안 예수님께 들어왔던 이야기와 예수님의 행적을 종합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 외에는 성령과 교제하고 동행하기 위한 기도에 인생을 걸었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21:36)
사도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에, 제자들에게 쉼 없는 기도를 권면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도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말하자면 이 기도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베드로, 바울사도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행하는 기도에 인생을 걸어서 위대한 성경의 위인들이 되었다. 송구스럽지만, 필자도 이 기도를 하고나서 인생이 확 바뀌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가르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로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하나님을 부르는 일에 인생을 걸지 않는다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의 삶과 영혼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지 못하고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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