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구원의 확신을 삶에서 증명하고 있는가?
요한 웨슬리는 약 300여년 전에 3대가 목회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는 청교도적 엄격주의의 반동으로 극도로 문란하게 되고 부도덕하였다. 산업혁명이 끼친 사회혼란 등으로 술 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 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다. 이처럼 웨슬리가 살았던 시대는 희망이 안 보이고 더욱 암울해 가는 시대였다. 당시 교회는 영국성공회와 청교도가 서로 싸우는 환경에서, 교회지도자들은 직업적으로 그들의 직무를 행할 뿐이었고, 사람을 회개와 중생의 길로 나오게 하는 아무런 영력도 없었다. 그는 학창시절 신앙심을 거의 잃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 매일처럼 코피가 쏟아지고 목구멍에서 피를 쏟고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루 2시간씩 기도하면서 영적인 진보와 실천적인 삶을 위해 투쟁한 끝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3년 후에 드디어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동생의 요청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라는 메소디스트(methodist)는 뜻으로, 오늘의 감리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구제에 헌신하였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 대학생들 앞에서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는 주제였는데, 이 설교가 많은 사람의 감동을 주며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이 웨슬리를 비웃으며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면 교회 제도나 성찬식은 쓸데 없는가 반문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웨슬리를 비방하는 근본 이유는, 실제 요한 웨슬리가 교회의 사치와 목사들의 타락을 사정없이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교회에서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었다. 이후로 그의 설교하는 곳에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다. 50년동안 지구 10바퀴를 넘는 거리를 다니며 설교하였으며, 매일 32킬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200권이 넘는 책을 썼지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성경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청중들을 향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열심히 선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과연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하는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에 긴 세월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흠 없이 거룩한 삶을 살고자 발버둥 치면서도 그분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는 자신의 죄로 절망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참된 구원은 선행을 행하는 인간 자신의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온다는 것을 단순히 신학적,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바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내적인 변화이다.” 웨슬리는 곧바로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하는 “성화(聖化)의 삶”으로 연결시켰다. “우리의 중요한 교리는 셋이니 회개, 믿음, 그리고 성결(성화)이다. 회개는 종교의 문간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이요, 성결은 종교 그 자체이다. 웨슬리의 이런 신학적 개념들이 구체적 인간들의 구체적 삶의 현실을 외면한 채 안락한 서재에서 나온 관념적 논리의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주로 목회현장에서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과 요구들에서 나온 실천적 신학의 산물이다. 믿음으로 거듭나고 구원받는 중생체험을 했다고 너무 자만에 빠지지 말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크리스천의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오늘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삶과 신학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이 시대에도 동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념적인 신앙에서 실존적인 신앙으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서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을 얻고, 거룩한 성품으로 성화되어야 완전한 구원에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실존이라는 말은 실제 우리의 삶에서 팩트로 증명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하는 믿음의 증거와, 실존하는 회개의 열매와, 실존하는 거룩한 성품의 변화인 성화가 팩트로 증명되어야 비로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에 빠진 것은, 구원의 증거가 실존하는 성령의 내적증거와 외적증거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팩트로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요한웨슬리를 추종하는 감리교도들이 웨슬리의 삶과 신앙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은 실존하는 구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1. 실존하는 믿음
우리네 교회는 롬10:10절의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구절을 암송하면서 자신이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실존하는 믿음이라면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표적과 믿음의 증거가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예수님은 일관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영적 능력이 주어짐을 약속하셨다. 그 믿음은 자기 확신이나 자기 암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주어지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믿음은 굳센 의지나 자기 확신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진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선물(은사)이겠는가?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마9:29)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당신이 믿는다고 생각한다고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위의 맹인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아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소원을 이루고 기도응답이 신속하게 내려오고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의 믿음은 자신의 착각이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없다면 천국조차 자신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성경은 믿음의 척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말하고, 믿음을 보이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믿음을 보이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쉬지 않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혹독하게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이들이다. 성경을 찾아보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라는 권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그러나 사람들이 눈이 가리어지고 눈이 어두워져서, 삯꾼 목자들의 가르침에 속아 무능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에 불과하다.
2. 열매로 증명하는 회개
회개의 의미에 대해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교인도 없다. 그러나 회개의 능력과 열매를 경험하며 사는 이들도 없다. 기이한 일이다. 그 이유는 회개를 자신의 양심에 찔리는 것을 내놓고 용서를 얻는 행사로 치부하며 죄책감을 없애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함이라. (사57:15)
위의 이사야의 ‘통회’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겸손한 마음’인 ‘스팔 루하’와 ‘죄를 뉘우치다’라는 ‘다카’라는 단어를 결합하여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깊게 뉘우치는 자의 영혼을 다시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납작 엎드려 깊이 죄를 뉘우치는 행위인 통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든지 아니든지 간에, 회개는 상투적이거나 모호한 개념의 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다. 필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 코칭을 해주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쫒아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의 기도훈련에 동참하여 기도를 사모하고 힘든 기도훈련을 인내하며 견디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을 시작하면 예외 없이 악한 영의 방해공작이 시작된다. 잡념이 들고 졸음이 쏟아지며, 갑자기 기도를 못하게 하는 이런 저런 사건이 발생하며, 배우자나 부모가 이 기도를 하지 말라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에 맞서 싸우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이들의 공격이 점점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 정점이 회개를 하는 시점과 맞물린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지난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깨닫게 해주셔서, 자신도 모르게 통곡하며 깊은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회개사건 이후에 기도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며 깊은 기도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면 죄를 회개하게 되면 악한 영이 그전보다 현저하게 힘이 못 쓰는 탓이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은 죄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러주셨기 때문에 다시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 영이 더 이상 힘을 못 쓰는 이유이다. 악한 영은 사람의 죄를 빌미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귀신이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쫒아낼 때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난다. 축출기도를 시작하면 대부분 격렬한 기침과 과도한 하품, 침의 배출, 괴성, 메스꺼움 등의 현상이 동반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유는 가슴과 배 등에 견고한 집을 짓고 살던 수많은 귀신들이 쫓겨 나가는 현상이다. 모든 귀신들이 성대를 통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많이 나가는 통로가 성대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가는 놈은 조무래기 귀신들이다. 센 놈은 이렇게 나가지 않는다. 하급영인 조무래기 귀신들이 어느 정도 나가면 고급영인 센 놈의 존재감이 몸 안에 조금씩 느껴진다. 가끔씩 꿈틀하는 느낌이 전해온다. 그러나 이 센 놈은 쉽사리 나가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틈만 있으면 갖가지 술수를 써서 기도를 못하게 하고 방해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래서 축출기도가 점점 힘이 들며 양방의 기 싸움이 치열하다. 이때도 전환점을 찍는 사건이 회개기도이다. 성령께서 그간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통곡하며 회개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하던 센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슬그머니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회개를 하게 되면 성령의 능력이 엄청나게 발휘된다. 그래서 아무리 센 귀신조차 진심어린 회개 앞에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회개란 이렇게 중요하다. 진정으로 하는 회개는 놀라운 영적 능력을 동반하게 된다. 악한 영은 죄를 짓게 하고 죄책감을 들게 하며 하나님을 떠나게 하여 생명과 영혼을 사냥하는 계략을 펴고 있다. 그 반면에 성령은 회개를 하게 하여 죄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싶어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마다 나름대로 회개하곤 한다. 그러나 입으로 회개하는 것과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은 다르다.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 회개의 영이시다. 성령은 기도하는 자녀의 마음에 들어와, 그동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성품, 행위, 속내 등을 깊이 깨닫게 해주셔서 통감하며 죄를 회개하게 해주신다.
회개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악한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악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으로 용서를 비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는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깊이 깨닫게 해주셔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기도할 때마다 회개를 요청하고, 항상 회개를 하려고 하여야 한다. 옛사람의 욕망을 지니고 있는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죄를 추구하려는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알면서도 짓게 되고, 혹은 모르고 죄를 짓는 일이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무척이나 싫어하실 뿐 아니라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회개기도는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연약한 육체를 지니고 있기 아무리 조심하고 노력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 항상 차고 넘쳐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죄가 들어올 수 없고, 설사 연약해서 죄에 걸려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회개하면 깨끗하게 씻어주시기 때문에 악령이 우리를 넘보지 못하는 것이다. 날마다 회개하여야 천국에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가게 된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친 소리가 천만금보다 귀한 기쁜 소식인 이유이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지우는 종교적인 행위로 알고 있는 교인에게 실재하는 회개의 능력이나 열매를 경험할 수 없다.
3. 성령의 내주를 증거 하는 변화와 능력
요한 웨슬리가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하는 것이 실존하는 구원의 증거라고 주장하였고, 우리네 교회에서도 믿음이 점진적인 성화를 가져온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는 자신의 확신이나 신학적인 주장으로 증명될 수가 없다. 배우자나 가족들이 인정해야 하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확인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느리지만 지금도 점진적으로 되고 있다고 변명으로 일관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변화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이처럼 실제적인 삶과 인격의 변화가 없는 이들조차, 자신이 성화되고 있다고 믿는 기이한 현상이 우리네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을 통해 변화되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바로 성령임을 모르는 크리스천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성령이 내주하셔서 다르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화가 진행된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성령이 당신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을 변화시키고 있냐는 것이다. 오홋, 그렇다고?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령의 내주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목회자에게 물어보면, 성경에서 있으니 그 사실을 믿는 게 믿음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에둘러 덮어버리고 있다. 감기에 걸린 사람은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나고 열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현미경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네 조상 중에는 감기 바이러스를 본 사람은 없었지만, 감기가 왔는지 나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증세를 보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자신 안에 들어온 증거는 무엇일까? 성경에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기도와 더불어 다양한 은사를 비롯한 놀라운 영적 능력은 기본이며,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능력이 없는 작금의 우리네 교회지도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못들은 체 하고 자신들의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이 자신 안에 있는 증거가 아무 것도 없는데 있다고 믿으라고 한다. 있긴 있는데 충만하지 않아서 그렇단다. 그래서 기도회시간이면 성령 충만을 얻기 위해 소리 지르고 난리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임재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다. 임재라는 말은 신학적인 표현이다. 임재의 사전적이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던 사도들과 120여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외적 증거는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의 표징이었고 내적 증거는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고 한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방언이 터지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며, 마음이 기쁘면 성령이 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감정의 격앙이나 방언만 가지고 성령이 임재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왜냐면 감정이란 외부 요인에 따라 자신의 생각이 섞일 수도 있고 귀신들도 얼마든지 감정을 격앙시킬 능력이 있다. 또한 방언은 귀신들도 속여서 넣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가 성경적인 은사로 이어지거나, 성령의 거룩한 성품으로 삶과 사역을 인도하거나,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지를 날카롭게 분별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간 후에, 그 때 받은 방언이 기도를 편하게 하는 방법이나 남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면, 이는 처음부터 성령이 주시지 않았거나 후에 변질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은 성령에 깊이 몰입된 상태에서 불가항력으로 나오며 자주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방언이 아니라 열광적인 집회에서의 기도 중에 나오는 방언이라면, 감정이 격앙된 틈을 타서 귀신이 속이는 방언인지 날카롭게 분별하여야 한다. 실제로 필자는 방언을 오랫동안 해 왔던 코칭 훈련생에게 방언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부르는 기도를 하라고 했을 때, 구토와 헛구역질, 트림, 하품 등이 나오면서 귀신들이 빠져나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했던 방언은 성령이 주신 게 아니라 귀신이 속여 넣어 주었다는 명백한 증거인 셈이다. 설령 성령이 임재 하였더라도 쉬지 않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면 떠나가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이 항상 내주하시는 상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내주라는 말 역시 신학적인 표현인데, 성령의 임재현상이 매일 일어나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이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 혹은 동행하신다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임재는 일회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성령의 내주는 오랫동안 증거가 지속되어야 한다. 필자가 경험한 성령의 내주는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가 있는데, 내적 증거는 기도할 때 뿐 아니라 기도가 끝나서 일상의 삶에서도 기쁨과 평안, 자유함을 누리고, 기도할 때마다 깊이 빨려 들어가서 몰입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외적증거는 내적 증거가 오래 지속되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되고 삶의 지난한 문제가 해결되며 성경에서 약속한 각종 은사들이 쏟아진다. 즉 성령의 능력이 내려오는 현상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외적증거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기도가 응답이 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도의 능력은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조금씩 다르다. 또한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강을 얼마나 깊이, 그리고 오래 건너갔느냐에 따라 탁월한 성령의 능력도 다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를 지속하려면 깊고 친밀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영적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성령의 내주가 지속되면 드디어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인데,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전에는 육체로 태어나서 살아왔지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그 변화의 초점은 부족한 성품에서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며,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좇아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인생관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모습으로 보여주어야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라야만이 하나님을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인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려면, 성령과 깊고 친밀한 영적 습관을 들여 쉬지 말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깨달음을 얻어 삶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녀가 죄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포함해서 말이다.
요한 웨슬리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신학과 무능하고 무기력한 종교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고 있던 당시의 교회에 큰 울림을 울리고 떠났다. 그가 내뱉은 말은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회개와 믿음, 그리고 거룩한 성품으로의 성화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가 살던 시대와 다르지 않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믿음으로 종교적인 의식과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면서 자신들의 구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다. 그 이유는 느낌이나 깨달음을 은혜로 치부하고 종교적인 신앙행위를 자신의 의를 삼으며 자기만족의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믿음에 대한 증거가 없다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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