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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관연구

Joyfule 2016. 10. 3. 10:44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관연구

 

IV. 신의 개념

1. 기독교의 하나님

(1) 삼위일체 하나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는 데 삼위는 각자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한 분 이시다.
기독교 소요리 문답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이 있다.
문: 하나님의 신격(Godhead)에 몇 위가 계십니까?
답: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으로서 본체는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십니다.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더라’(개역성경 마태복음 3장 16절-17절). 이 구절에서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자는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부의 음성을 들으시고 성령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한편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유일성은 영존하시며, 그 성품에 있어서 비분리적이고 불가분적인 절대자를 의미하고 언제나 기독교적 유일신론은 삼위일체론 으로 나타나며 ‘한분의 신’과 ‘삼위이신 하나님’은 항상 동시에 제기된다.
초대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 정리를 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신앙은 이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서 한분 하나님을 섬기며, 통일된 삼위일체를 섬긴다. 삼위일체의 각 위를 혼란시킴 없이, 그리고 본질을 나눔이 없이, 성부도 한 위격이시고 성자도 한 위격이시고 성령도 한 위격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한 분이시다. 동일하게 영광스러우시고 함께 영원히 존귀하신다. 성부가 그러하신 것처럼 성자도 그러하시고 성령도 그러하시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각 위가 하나님이요 주라고 인정하는 만큼 세 분의 하나님, 세 분의 주가 있다는 생각을 금한다.”


또한 초대 교부인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부께서 신성(神性) 전체의 처음이시다. 삼위일체 내부의 상호 관계에서 낳는이를 처음이라고 한다면, 성부는 성자에 대해서 처음이시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또한 ‘처음’이란 말을 위격에 관해서만 쓰고, 본질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 본질 자체를 말할 때는 처음이나 근원이 없다. 따라서 낳으심(발생, generation) 과 불어내심(파송, expiration)으로써 ‘처음’이 되셨다고 하는 것은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위격과 관계에 관한 것, 즉 삼위일체적인 종속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장 26절) 라고 하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단순히 존귀한 분들이 사용하는 일인칭 복수가 아니며, 복수를 단수로 변화시켜서 ‘내가 내 형상을 따라 내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자 없이 성부가 홀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라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기록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2) 성부 하나님
성경의 기록자 중의 한 명인 요한은 성부 하나님의 본질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그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시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장 22절). ‘전능하신’(Almighty)이라고 버역되고 있는 헬라어 ‘판토크라토스’는 ‘막강한, 무적의, 모든 것을 통치하는’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어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샤다이’ 라는 단어를 번역하는데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샤다이’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세기 17장 1절)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둘째 그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 1서 1절 3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요한 1서 2장 13절),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구나’(요한 2서 4장).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표현들도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효한복음 1장 14절-18절). 이들만 살펴보아도 요한의 기록들 가운데는 (하나님)아버지의 관념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다음과 같은 요한복음3장 35절의 말씀이 기록자의 말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말씀인가의 여부를 막론하고 이들은 이 복음서의 주제가 되는 진리 가운데 하나를 분명하게 내세워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요한이 제시하고 있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초점을 의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요한의 기록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바, 무려 150 군데나 되는 아버지(하나님)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3) 성자 하나님
요한복음에서는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 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용어가 채용된 구절들을 주경적으로 연구하면 크게 네가지 개념으로 요약된다.
첫째 아들의 선재성(Pre-existence)을 보여준다. 아들은 위로 부터 나신 분(3
장 13절과 8장 23절)이요, 아버지의 품속에 있던 자로서 나타나신 분(1장 18절)
이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5장 24절)라고 나타낸다. ‘보낸다’라는 단어가 40회 이상 채용되었고 이와 동질개념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왔다’(8장 42절, 16장 28절과 32절)고 주장하였다. 곧 ‘보냄을 받은 자’란 개념은 자신의 선재성을 주장하는 의미임을 보여준다.
둘째 아들의 독특성(Unique Sonship)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독특한 단 한명의 아들임을 요한은 남달리 강조하였다. 요한복음 1장 14절과 18절, 3장 16절, 18절에서 ‘독생자’(monogenes-모노게네스-헬라어 발음)을 언급한다. 이는 ‘독자’(only begotten son)로 번역하면 안된다. ‘모노게네스’를 Jerome의 라틴어 불가타 역본에서는 Unicus(only)를 강조하여 번역하였다. 이는 Jerome(347-420)이 예수님을 피조물이라는 아리안파(Arian)의 요구에 부응하여 ‘모노게네스’를 unigenitus로 즉 독생자(only begotten son)로 번역하였다. 이 라틴어 불가타(Vulgate) 역본의 영향이 영어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 미쳤다. 한글 성경은 이에 따라 번역된 것이다. ‘모노게네스’는 ‘모누스’와 ‘게노스’의 합성어로서 ‘모누스’는 질적 독특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게노스’는 ‘겐나오’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 출생적 의미를 갖는 ‘낳다’라는 말과 관련된 용어가 아니라 ‘기노마이’즉 ‘…되다’란 용어와 관련된 것으로서 출생적 의미(begotten)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독자’라는 개념보다는 ‘독특한 아들’임을 요한은 강조하고 있다.
셋째 아들의 성부와의 동질성(Oneness)을 보여준다.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이 위격(person)에는 구별이 되지만 본질에서 동질임을 자격(子格 - Sonship)으로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사역에 있어서도 아들의 천상 사역과 지상 사역을 연관하여 고려할 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으로서 아들의 사역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질성을 갖는다라고 강조하고 있다(3장 16절, 6장 51절-53절, 10잘 11절과 28절, 12장 27절, 15장 13절, 17잘 19절) . 그러므로 출생적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넷째 아들의 메시아적 사역의 의존성을 보여준다. 보냄을 받는 자는 보낸 자의 일을 한다. 그렇다고 보낸 자의 사역보다 보냄을 받은 자의 사역이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여기에서 그 사역상의 의존성을 본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20정 30절과 31절). 메시야 되심과 아들 되심은 불가분리이다. 아들의 메시야 직임이 아버지에 의존적인 것은 아버지에 뜻에 절대적으로 아들이 복종함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아들로서 메시야적 사역을 수행한다(5장 19. 20. 26. 30. 43절, 6장 57절, 8장 34. 35절, 10장 17절, 18장 25절).

(4) 성령 하나님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주장에서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하였다.
첫째로 성령은 피조물과 공통점이 전혀 없으며, 성삼위 안에 있는 신성에 속하며 그 신성과 하나라고 하였다. 성령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며 성화와 생명을 베풀며, 불변적이고 무소부재하시고 유일하시다 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서 본질공존체로 계신다.
셋째로 성령은 성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성자가 본질에 있어서 성부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도 본질에 있어서 성자에 속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의 창조사역에 성자와 더불어서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거룩하시고 축복받으신 성삼위는 그 자체상 분할할 수 없는 하나 이시다. 성부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면 말씀도 포함하게 되고, 성자안에 계신 성령도 포함하게 된다. 만일 성자의 이름을 부른다면 성부는 성자안에 계시고 성령도 그 말씀 밖에 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성취되는 단 하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2. 이슬람교의 하나님

‘La ila illa Allah - 알라 외에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알라외에는 경배를 받을 만한 가치있는 존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알라(Allah) 하나님은 자신의 단일성 유일신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그의 신격(Dhaat)에서도 하나(One)이며 그의 사역(Af’al)에서도 하나(One)라고 하였다. 그의 신격이 하나라는 것은 다신론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알라 하나님 자신은 삼위 또는 삼인격이 하나가 되어 유일신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알라 자신의 인격은 일위, 즉 일신격 뿐이라는 것이며, 속성에서 하나라는 것은 신성이나 신격의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사역에서도 하나라는 것은 알라 자신이 이미 사역을 행하였거나 현재와 미래에 있을 사역은 알라 하나님 자기 외에는 어는 누구도 행할 수 없다며 오직 자기 혼자(Only one)만이 처음부터 일위(一位), 즉 하나(One)로 존재하였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도 자기 혼자 일위인 하나님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고 꾸란 112장은 강조하고 있다.
“일러가로되, ‘하나님은 단 한분이시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성부와 성자도 두지 않으셨으며 그분과 대등한 것 세상에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