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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 丹村 구회득(具會得)

Joyfule 2012. 9. 15. 07:46

  기의 편 -  丹村 구회득(具會得)

보통 사람들은 유년의 일을 몇 살 때까지 거슬러 기억해 낼 수 있을까?
문득문득 이러한 생각을 가져보는 것은 나의 경우, 세 살 무렵 피난시절의 한 장면이 가끔 흑백영화처럼 떠오르곤 해서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어느 날 꿈속에서의 일인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거의 마흔이 다된 나이에 우연히, 그것도 아주 순간적으로 실제장면과 맞닥뜨리면서 그 즈음의 어슴푸레 했던 여러 기억들이 사실로 되살아났다.
1950년, 6.25가 나던 해 8월말이나 9월초쯤 되었으리라. 경북 북부 지방인 의성(義城) 사람들도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나는 막 세 살이었다. 
  

어른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우리 집은 어미소와 송아지에 짐들을 싣고 다녔다는데, 거기에 대한 기억은 확실치가 않고 어디쯤인가 개천가 자갈밭에 흰 이불홑청으로 천막을 치고 지냈던 기억은 있다. 시골 작은 할아버지네도 우리와 잇대어 천막을 쳤고 같은 마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도 여기저기 섞여 있었던 듯하다. 이들 피난촌 바로 앞 개천에는 삼 사십 미터 넓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후만 되면 정강이 깊이의 개울물을 건너 맞은편 산기슭으로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뜯기곤 하였는데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숲은 무성한 편이었고 늘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밤을 따주곤 하였다. 햇밤을 따먹었으니 피난간 것이 9월 초쯤이었던 것이 더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개천 저 아래쪽으로는 굉장히 큰 다리가 놓여 있었고 피난민들이 빽빽이 건너 다녔다.
아스라이 먼 저편 끄트머리에서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이런 희미한 기억의 단편들 가운데서도 실제라고 믿어지는 더욱 또렷한 장면이 있다. 계속되는 피난길에도 같은 마을 동갑내기들은 곧잘 걸어서 따라다녔다는데 나는 늘 어머니에게 업혀 다녔고, 머리에 무거운 봇짐을 이고 있어서 내 엉덩이를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매달리다시피 업혀서인지 발에 몹시 쥐가 나서 순 사투리로 "발 째랍다"(발 저리다)고 보챈 적이 있는데 이 말은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말이다.
  '발 째랍다'는 한마디와 이러한 피난살이 모습은 나이 들어서도 한 장의 사진으로 늘 머리 속에 남아서 실제로 있었던 일 같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란 몇 달 사이에도 큰 차이가 나는지 피난에서 돌아온 이후의 일들은 비교적 상세히 기억할 수 있었다. 온 동네가 잿더미로 변하여 있었고 산밑에 위치한 우리 집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한동안 몇 집이 함께 살았다. 또 인민군 서류가방도 방에 하나 걸려 있어서 초등학교 들어가서 한참동안 책가방으로 메고 다니기도 하였다.  
 

 우리들이 한참 철이 들 때까지도 어른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피난 얘기로 밤이 늦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매번 비슷한 얘기였지만 남쪽으로 걷고 또 걸어 간동, 하양, 경산, 청도까지 내려가면서 죽을 고생을 하였고 특히 첫 피난지인 간동에서는 매우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그저 팔 배게 삼아 들었을 뿐 간동이나 청도 등을 특별히 기억해 두지도 않았었다.
  

사 오 년 전, 그 때도 9월 정도 되었으리라. 추석을 맞아 고향에 들러 돌아가신 아버님께 성묘하고 대구로 나오는 시외 버스에 앉아 한가로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스쳐 가는 이정표를 보니 막 지나가고 있는 마을이 바로'간동'이었다. 이 길을 그렇게 많이 왕래하였건만 전에는 보이지 않던 팻말이 그날 따라 왜 그렇게도 똑똑히 보였던가.
  

내 머리 속은 일순간 한 장의 희미한 옛 사진이 떠오르면서 혹시 '그때 그곳?' 했더니 버스가 마을을 벗어나서 새로 놓은 다리를 가로지르는 순간, 아! 저 앞 삼 사십 미터 거리로 그때 피난민들로 빽빽하던 그 길고 커다랗던 다리는 이제 좁고 낡아서 폐허로 남았고, 더 멀리 백 여 미터 위쪽에 아버지가 따주던 밤을 받아먹던 그 산이, 바로 그 개천이, 사십 여 년 간 기억 속을 맴돌던 희미한 사진과 겹쳐지면서 오후의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한순간 버스는 모롱이를 돌았고 나는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며 한참을 들떠 있었다. 그렇게도 오랜 세월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던 장면들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그 날 이후, 먼 기억의 저편에서 뭔지 모르게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듯한 그곳을 지날 때마다 떠난 지 오랜 고향산천을 마주하듯 감회에 젖어 유년시절로 끝없는 기억의 순례를 떠나게 되곤 한다. 특히 그때 산중턱 어디쯤에서 피난살이의 고단함을 잊고 저녁나절 소에게 풀을 뜯기며 밤을 따 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언제나 또렷이 떠오르고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을 아쉬워하게 된다.  
다가오는 추석에는 성묘 길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제는 폐허로 남은 다리를 지나 홑청으로 천막을 치고 살았던 자갈밭을 밟아 보아야겠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처럼 바지를 걷어올리고 정강이까지 차는 개울물을 건너서 아직도 산중턱에 그 밤나무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