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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나무 불꽃 - 구활

Joyfule 2012. 9. 14. 02:33

   능금나무 불꽃 - 구활

지난 초겨울 일이다. 사과 농사를 짓는 후배가 능금나무 장작 한 짐을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찾아 왔다. "형, 이 능금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면 불꽃이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언제 시간이 나는 대로 불꽃 구경을 한번 해 보세요."

"미룰 것 없네. 내킨 김에 바로 산으로 가 장작불에 닭이나 한 마리 고아 먹어보세." 그 길로 팔공산 허리춤에 있는 친구 몇이서 공동으로 마련한 참샘골 산막(山幕)으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긋불긋 화려한 깃털의 수탉에게 총애를 받던 씨암탉이 옷을 벗고 자궁이랑 내장까지 깡그리 쏟아버린 그야말로 빈 몸으로 대소쿠리에 담겨 아궁이 옆에 도착했다.
무쇠 솥에는 벌써 물이 끓고 있었다. 불쏘시개에서 옮겨 붙은 능금나무 장작은 활활 잘도 타올랐다. "저 불꽃 좀 보세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불꽃은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불꽃의 색깔은 찬란했다. 불붙은 황토 아궁이에는 '보남파초노주빨'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오만 색깔의 불꽃들이 미국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 연못 분수에서 음악에 맞춰 물줄기가 솟아오르듯 신나는 소리를 질러가며 튀어나온다.

장관이었다. 닭 한 마리를 고음하는 아궁이가 능금나무 불꽃 때문에 관객 두 사람을 초대한 공연장으로 변하다니. 아궁이 속에서 불꽃들의 다양한 전개와 붉은 색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바뀌는 빠른 변환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거느린 볼쇼이 발레를 보는 것 같았다. 타는 불꽃에 몰입하다 보니 아궁이는 더 이상 아궁이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큰 공연장의 무대였다.

후배와 나는 몽당 빗자루 하나와 장작개비 한 개가 의자로 놓여져 있는 아궁이 앞 객석에 앉아 불꽃 공연을 즐기고 있다. 구들장 밑으로 파고 들어가는 불꽃은 오케스트라를 어렴풋이 비추는 조명이며 노랑과 초록 그리고 빨강 꽃불이 내미는 날름거리는 혀는 빛이 아니라 내 귀에만 들리는 음을 따라 출렁거리는 율동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불꽃 춤사위는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불꽃 향연. 황토 아궁이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백조의 군무를 이렇게 이름 붙이고 나니 더욱 근사했다.

아궁이 속의 불꽃들이 치열하게 웅성거리면 무쇠 솥은 수레에 짐을 잔뜩 실은 황소가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내 뿜는 콧김 같은 것을 연방 뿜어낸다. 이윽고 불길의 기운이 자지러지면 오케스트라의 선율도 가늘어진다. 화려한 불꽃들이 숯불로 이글거릴 때쯤 오데트와 오딜 역을 맡은 흑조 두 마리가 왼쪽 무대 끝에서 발끝 걸음으로 종종거리고 나와 공중에서 서너 바퀴를 도는 고난도의 푸에테 동작을 화려하게 구사하면서 지그프리트 왕자를 찾아 나선다. 연기를 내면서 타고 있던 능금나무 옹두리가 마지막 힘을 모아 불꽃을 뿜어 올리는 모양새는 타악기들이 지휘자의 지휘봉 끝을 향해 터지는 팡파레에 맞춘 듯 하다. 이와 때를 같이한 금발의 러시아 백조와 흑조들은 긴 팔과 다리를 평행으로 펼치며 날아오르기도 하고 불꽃이 이글거리는 수면 위에서 튀어 오르며 포말 비슷한 꽃 재를 날리고 있다.

백조의 호수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일어나 박수를 쳤다. 휘익 휘익, 짝짜 짜짝 짝. 공연은 '호두까기 인형'으로 다시 이어진다. 내 귀에는 악기에서 울려 나오는 선율들이 온갖 풀들을 눕히는 바람의 파장처럼 밀려오고, 밀려온 음들은 뒤따라오는 다른 음들에게 제자리를 내주고 빠져나간다. 그러면 사랑의 후원자들이 보내온 선물들을 원생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벽장 속에 감춰버린 몹쓸 고아원 원장의 음흉한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원장의 눈을 피해 벽장에서 나온 호두까기 인형은 이탈리아 대리석 바닥에 구슬이 떨어져 똑똑똑 굴러가는 소리를 내면서 주인공 클라라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이럴 땐 능금나무 장작도 탁탁탁! 하고 불꽃을 날리며 맹렬한 기세로 타오른다.

2막이 시작되어 봉봉왕자와 슈가공주가 사탕과자 나라에서 멋진 발레를 선보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불길이 이만하면 내장하고 똥집은 익었겠지요. 소금하고 참소주는 이리 갖고 올까요."라고 소리친다. 얼떨결에 "그러지 뭐"라고 대답하는 순간 공연장의 더 넓은 무대는 사라지고 황토 아궁이는 열기에 터져 버린 언청이 입술 같은 아궁이로 돌아와 있었다.

능금나무 장작이 타는 아궁이 앞에서 볼쇼이 발레를 구경한 것은 시간적으로는 찰나라고 해도 좋을 일순이었지만 그 감동이 오래 오래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느낌의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계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젠 그만 떼세요." 능금나무 불꽃 공연이 너무 너무 좋은데다 금방 익혀낸 똥집과 내장 안주가 또한 일품이었다. 두 관객은 아궁이 앞에 펑퍼져 앉아 닭 한 마리를 다 꺼내 먹을 때까지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그런데도 별로 취하지 않았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싣고 간 능금나무 장작이 혹시 없어질까 봐 온갖 허드레 물건을 넣어두는 장 속에도 일부 숨겨두고 바깥 비밀 장소에 꽁꽁 감춰 두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껴도 한 해 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비싼 공연 보러가다 길거리에서 티켓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고 섭섭했다.

후배에게 "능금나무 장작 불꽃이 근사하던데 그걸 좀 더 구할 수 없겠느냐"고 통사정해도 "고목은 모두 베어버려 이젠 구할 수가 없는데요"라는 대답뿐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작은 꿈 하나를 키우고 있다. 언젠가, 아니야 언젠가가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내 단독 소유의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택의 형태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다만 거실에는 아궁이를 개조한 벽난로라도 좋고, 그 벽난로가 황토 아궁이 모양을 하고 있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작정이다. 그래서 청도 창녕 청송 등 과수원이 폐원으로 변한 곳을 수소문하여 능금나무 장작을
확보하는 일을 서두를 것이다.

정말이지 능금나무 장작 한 트럭 정도만 추녀 밑에 쌓아놓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이 행복해 질 수 있을 텐데... 능금나무 장작이 불꽃으로 활활 타고 있는 황토 아궁이 앞에서 나는 보리라. 그리고 즐기리라. 평생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어 몸을 떨고 살아왔던 내 저리고 아팠던 생애를 보리라. 그러면서 그 취한 눈과 귀로 불꽃 향연에 어울리는 챠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듣고 볼쇼이 발레를 보면서 머지않아 닥쳐올 황혼을 정중히 맞으리라. 오, 정말. 그렇게 취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