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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 - 조미정

Joyfule 2015. 4. 29. 11:07

 

[2014 철도문학상 우수상]

 

To treno fevgi stis okto (기차는 8시에 떠나네) - Agnes Baltsa 외

  

기적소리 - 조미정

 

 

 담장 너머 눈발이 날리는 기찻길에서 울컥 하고 기적이 운다. 대문 앞에 조등弔燈으로 내걸린 등불은 꺼지고, 썰물처럼 조문객들은 빠져나갔다. 홀로 앉아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늙은 소의 워낭처럼 낮게 흔들리는 소리가 뻐근하다. 내 마음은 가슴 한 구석에 쟁여두었던 기억의 빗장을 열고 덜컹덜컹 침목 위를 달려간다.

 

 친정으로 신행을 갔다가 시댁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날도 눈이 내렸다. 몇 십 년만에 내린 대설에 텔레비전 화면은 종일 크고 작은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다. 시댁으로 보낼 이바지 음식을 바리바리 싸며 흘끔거리던 엄마가 나를 붙잡았다.

"꼭 오늘 가야 되나?"

 

 시댁이 있는 울산에서도 눈이 많이 내렸다. 하룻밤 더 자고 내려간들 뭐라 탓할 어머님도 아니었건만 나는 그날 내려가기를 고집했다. 시큰둥한 내 맘을 눈치 챘는지 엄마도 더 이상 붙잡지 못했다.

 

 어렵사리 한 결혼이었다. 맞선 자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왔지만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었던 터라 나는 엄마와 팽팽한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학사장교로 군 복무 중이던 남편이 마뜩찮아 엄마는 좋은 혼처 다 놓친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자리를 만들어 선을 보게 한 적도 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성실하고 선한 남편의 됨됨이에 결국 엄마도 항복을 하고 말았다.

 

 엄마는 내 결혼식에서 절대 울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잘 지내다가도 끝에 가서는 토라져 자주 얼굴을 붉히던 애물단지 딸이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홀가분한 것처럼 보여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덤덤해 보이던 엄마가 막상 식장에서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한참 뒤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나는 친정에 오래 머물수록 엄마 애만 쓰이게 한다 싶었다. 하룻밤 머물고서는 서둘러 떠나려고만 하니 얼마나 야속했을까. 눈은 핑계이고 사실은 하룻밤만이라도 딸과 함께 자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사춘기 이후로 한 번도 엄마와 한방에서 자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인가. 한때 바람을 피운 아버지 때문에 속이 상한 엄마가 곁에 누웠을 때도 등을 밀어냈다. 쓸쓸해 보이던 엄마의 등허리가 아직 눈에 선하다. 그 이후로 엄마는 늘 내게 생인손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엄마가 안쓰러울수록 말을 퉁명스럽게 나왔다. 밖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참한 아이가 엄마에게는 못된 딸이었을 게다.

 

 수십 년을 살아도 고향은 나를 묶어두기보다 지긋지긋한 곳이었다. 가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집 앞 기찻길로 하루에도 몇 번씩 완행열차가 지나가면 내 마음은 냅다 달리기부터 하곤 했다. 언젠가는 노란 불빛이 엿가락 같이 새어나오는 새벽기차에 몸을 싣고 가난한 동네를 떠나버리고 싶었다. 기회는 그로부터 십여 년도 더 지난 후에야 찾아왔으나 몸만 자란 나에게 엄마 마음을 헤아릴 깜냥은 없었다.

 

 드디어 고향을 떠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먼저 벌렁거렸다. 내리던 눈은 잠시 소강 상태였다. 걱정 마시라 호기롭게 외치고 대문을 나섰다. 엄마는 기차 건널목 건너 큰길까지 배웅을 나왔다. 아무래도 못 미더운 눈치였다. 눈이 드문 지역이라 작은 눈발에도 교통체증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던가. 나도 내심 긴가민가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정류장은 떠나지 못한 차들로 미어터질 듯했다.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발만 구르는 사람들의 애간장은 바닥까지 바짝 졸아들고 있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버스를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바지런히 발품을 팔아 겨우 기차표를 구했다. 다음 날 새벽녘에 떠나는 첫 완행열차였다. 덕분에 추운 겨울밤을 꼬박 대합실에서 새워야 할 판이었다. 친정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올까 생각을 했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당하게 손을 흔들고 나온 터라 되돌아가기 멋쩍었다. 게다가 몇 시간쯤 후미진 계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는 노숙을 고생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결혼과 함께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한다. 플랫폼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 같았다. 기차는 다른 세상으로 나를 실어 나를 것이다. 곧장 앞만 보고 달리다가 때로는 터널이 나오기도 하리라. 그리고 힘이 들 때는 간이역에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리라. 모든 것에 자신만만 했으니 다가올 삶의 여정에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수북이 산야를 덮은 눈이 세상의 소리를 다 집어삼켜 버린 것일까. 새벽기차는 두런거리는 속삭임조차 없이 고요했다. 사람도, 풍경도 졸음에 겨워 눈을 감았다. 웬일인지 나는 두 눈이 말똥말똥했다. 기차는 동대구역을 떠나 허름한 변두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쯤이다 싶어 내다본 차창 너머로 고향 집이 눈 깜짝 할 새 지나가고 있었다. 공중전화기 말고는 마땅한 통신시설도 없던 시절이었다. 잘 도착했다는 전화 한 통화 제대로 못 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났다. 불 켜진 집 안에서는 밤을 꼬박 지새운 엄마가 집 앞을 지나는 기적소리에 몸을 뒤척였으리라.

 

 삶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부간의 갈등보다 동서지간에 부딪히는 마음고생이 더 심했다. 형님과 시누의 등쌀에 끼여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남편의 사업실패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앞이 막막한 우리를 위해 어머님은 시골의 땅 한 뙈기를 팔았다. 그런데 그 돈을 어머님 몰래 형님이 가로채 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나에게 형님은 오히려 시숙 명의의 땅을 팔았으니 고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큰아들이 판검사가 될 것이라고 물심양면 지원했던 어머님은 어쩌겠냐며 우리보다 큰아들 걱정을 먼저 하였다. 그 후로 시댁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궤도가 하나뿐인 구간에서 기차가 지나다니는 방법은 여러 차선을 가진 도로와 다르다. 상행선과 하행선이 같기 때문에 선로는 붙었다 떨어졌다 자주 자리를 바꾼다. 마주 오는 기차가 있으면 달리는 기차는 잠시 멈추고 선로에서 비켜선다. 그리고는 반대편 기차가 지나갈 때가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인생도 그러하리라.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추어 비껴서면 될 것을 괜히 안달을 내며 또 한 번 황소고집을 부렸다. 너무나 절박한 마음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삶은 부딪치는 일이 많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견디기 힘들었다.

 

 어려움에 놓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등을 돌리지만 진정한 관계는 손을 잡아준다. 내게 엄마가 그랬다. 삶의 파고에 이리저리 휩쓸릴 때마다 머무를 수 있는 작은 역과도 같았다. 다 큰 딸 때문에 속이 문드러져도 엄마는 다 받아주었다. 평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위안을 주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이제 폐역이 되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머니라는 역이 새삼 그립다.

 

 삶이라는 기찻길에는 숱한 이별과 만남이 공존한다. 떠나는 이가 있으면 돌아오는 이도 있다. 그 날의 기찻길에 나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기 위해 떠나고 엄마는 품었던 자식을 떠나보내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거꾸로다. 엄마는 떠나고 내가 보내는 사람이 되었다. 생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해주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기적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철길을 달리는 기차는 엄마의 따뜻한 품으로 나를 실어 나를 것만 같다. 눈물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제 엄마를 영원히 보낼 시간이다. 길게 울음 울며 흩어지는 기적소리에 미안함과 그리움을 묻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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