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동서문학상 수필 은상]
포대기 - 이혜경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큰엄마는 기어이 내주머니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애 낳을 때 못 와서 미안하다. 이걸로 포대기라도 하나 사거라."
물기 오른 눈빛 앞에서 뿌리치던 손이 스르륵 풀리고 말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품고 다녔으면 각진 모서리가 보들보들 허물어졌을까. 빈 봉투를 채우기까지 성치 않은 다리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걸레질했을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뜨거워졌다.
사람 좋기로는 동네에서 큰엄마를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때마다 밥을 먹으니 사람인 줄 알지, 그렇지 않으면 부처라고 믿을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이웃들에게 선뜻 밥솥을 열었고, 마을 경조사가 있으면 내 일처럼 부엌데기를 자처했다.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이지만 찔레꽃을 닮은 미소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묻어났다.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삶의 여정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혼자 몸으로 어떻게 살림을 꾸려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상한 것은 집안 어디에서도 큰아버지의 흔적을 티끌만치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빛바랜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이 조금씩 달랐다. 전에는 월남전에서 실종되었다고 하더니 어떤 날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그 얘기만 나오면 ?그늘이 드리워지는 모습에 더 물을 수도 없었다.
젖먹이 시절부터 나는 유난히 큰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다녔다고 한다. 엄마를 제쳐 두고 큰엄마에게 포대기를 끌고 가 업어 달라 떼를 썼단다. 포대기 밑으로 다리가 쑥 삐져나올 만큼 자랐어도 큰엄마 등에 업혀 동네 마실을 다녔다.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몇 시간이고 등에 업고 달래면서 재우기도 했다. 늘 내 차지였던 따뜻한 등이 있었기에 동생이 태어나서 엄마를 빼앗겨도 별로 시샘이 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는 방학만 되면 아예 큰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엄마의 따가운 잔소리를 피해 마음대로 놀 수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아도 큰엄마는 미간 한 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꾸지람은커녕 나와 친구들을 위해 이것저것 간식을 내 왔다. 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던 내 편이 있어서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사춘기 무렵, 우연히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껏 큰엄마로 알고 있던 분이 실은 큰아버지 부인이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버지와 처음 결혼을 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집 안의 삼 대 독자인 아버지가 결혼한 지 몇 해가 지나도 자식을 보지 못하면서 두 분의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아버지는 엄마와 재혼해 늦은 나이에 자식을 얻었다. 비록 부부로 이어진 줄은 끊어졌지만 인연은 끝난 게 아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서 혼자 지내던 큰엄마와 왕래가 이어졌기에 우리 남매들은 그분을 친척이라 믿었다. 유독 큰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말끝이 흐려지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그 시절은 툭하면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사춘기였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가족사는 내 마음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이제껏 큰엄마로 알았던 분이 아버지의 전前부인이라는 것을 하루아침에 받아들이기는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의 이중성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가족들에게 늘 다정다감한 미소를 보여주는 아버지가 큰엄마 가슴에 못을 박은 장본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비밀을 감추고 계속 왕래를 해 온 엄마와 큰엄마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엌에서 나란히 앉아 제사 준비를 하던 두 분의 모습은 자매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어찌 그리 태연한 얼굴로 속이야기를 털어놓고 지냈는지 내 깜냥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친엄마 이상으로 마음을 기댔었지만 모든 사실을 안 이후로는 전처럼 허물없이 대할 수 없었다. 괜찮은 척 하고 싶어도 마주하는 순간부터 얼굴이 굳어지고 말문이 닫혀 버렸다. 그분의 잘못이 아닌 걸 알지만 더 이상은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나에게 큰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처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된 후에야 비로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큰엄마를 바라볼 수 있었다. 사방 천지에 말 한마디 섞을 가족 한 사람 없이 지냈으니 그 허전함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으리라. 껍대기뿐인 빈 둥지에서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까? 어쩌면 나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은 것도 지독한 외로움을 달래보려는 슬픈 몸부림이었는지 모르겠다. 차갑게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갔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른들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 노력했다. 설사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가벼운 마음이 되고자 했다.
여자로서 새 생명을 품지 못하는 것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라 그런지 내 임신 소식을 듣고서 누구보다 기뻐했다. 나에게만은 당신과 같은 아픔이 비켜가기를 누구보다도 바랐을 것이다. 꼭 잡은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격하는 모습에서 평생 동안 지울 수 없었던 상처가 희미하게 전해졌다.
큰엄마가 놓고 간 돈으로 포대기를 하나 장만하기로 했다. 이미 손에 익은 아기띠가 있지만 포대기를 사라던 큰엄마 말이 귀에 쟁쟁해서 동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큰 시장으로 향했다. 알록달록한 색상에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요란한 모양새의 아기띠와 달리 포대기는 생김새부터 무척 단순했다. 촘촘하게 누빈 직사각형 몸판에 달랑 긴 띠 두 개가 붙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덜컥 사 오긴 했지만 초보 엄마가 익숙한 아기띠 대신 포대기로 아이를 업는 일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거울을 보면서 아이를 등에 올려야 할 정도로 손놀림이 서툴렀다. 포대기로 둘러 업고 집안일을 하다가 아이를 떨어트릴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엉성한 솜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포대기에 업히는 것을 좋아했다. 이유 없이 칭얼거리다가도 포대기에 싸이기만 하면 까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밀쳐 둔 포대기가 눈에 띄기만 하면 업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의 자궁처럼 온몸을 감싸주는 포대기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아이가 커 가는 모습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퍼즐을 하나씩 찾아낸다. 기억의 조각을 맞출 때마다 내가 그동안 큰엄마로부터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새삼 깨닫는다. 비록 배 안에 품어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큰엄마는 포대기로 감싼 넉넉하고 푸근한 정을 내 주었다. 남들처럼 불룩한 배를 가질 수 없는 대신 남들보다 훨씬 깊었던 큰엄마 등에 업혀 어린 나는 달콤한 꿈을 꾸며 잠들었으리라.
등 뒤에서 얼굴을 파묻은 채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들린다. 포대기는 몸만 감싸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하나로 이어준다. 엄마 등에 심장을 나란히 맞댄 아이는 온몸을 밀착해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 옛날 큰엄마의 포근한 등에 업혀 행복한 꿈을 꾸었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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