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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속의 가시 - 박완서 (중)

Joyfule 2015. 12. 18. 05:50

 

 

 

꽃잎 속의 가시 - 박완서 (중)

 

누런 베옷들이었다.

우리가 그 느닷없는 이물감을 미처 어째볼 새도 없이 언니는 그 안의 것들을 한가지씩 끄집어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원삼, 당의, 천금, 지요, 멱목, 악수‥‥그것들은 수의였던 것이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만요."

조카가 먼저 격앙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했고, 질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딴 식군들도 우르르 질부를 따라나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왜 조카며느리가 울고불고 위로받아야 할 일로 둔갑을 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언니가 꺼내놓은 것들을 가방에 도로 쑤셔넣기에 바빴다.

졸지에 분란을 일으킨 것들을 우선 안 보이게 하는게 수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갖은 수의로 해달라고 했지."

언니가 이를 악문 듯이 야무지게 말했다.

언니답지 않게 도전적인 표정이었다.

갖은 수의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식을 한가지도 생략함이 없이 고루 갖춘 수의를 말한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장손의 경사를 앞둔 집에 수의가 아랑곳인가.

그러나 언니는 자신이 일으킨 파문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일찍 자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잠간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질부가 처음 모셔보는 시어머니를 위해 새로 꾸며놓은 폭신하고 가뿐한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언니는 자신이 졸지에 구박데기로 전락한걸 아는지 모르는지 매사가 귀찮은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푸석하고 미련스러워 뵈는 언니를 내려다보다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질부는 전화로 누군가와 다투고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격정적인 언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식구들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면? 아니면?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잘난 딸들은 생판 모르는 일이라고 앙큼을 떨더니 자네는 또 그게 아니라구? 오해라구? 칠십 노인한테 수의를 안동해서 보낸게 여기서 돌아가란 소리가 아니면 무슨 소리냐구? 여직껏 이 집 저 집 조리를 돌려 가며 식모처럼 알뜰하게 부려먹다가 이제 자식들 다 길렀겠다 아쉬을 거 없을 때, 노인네 근력 떨어지니 마침 잘됐다 이거지? 그럼 난 뭔가? 말이 좋아 맏며느리지 누굴 등신인 줄 아나? 맏며느리는 배알도 없는 줄 아나본데 잘 들어둬. 자네나 나나 땡전 한푼 없는 이민자 가족한테로 시집와서 자수성가하긴 마찬가지야. 그래도 자넨 노인네 노동력이라도 이용했지만 난 일찌거니 시집 그늘 벗어나서 덕본거 하나도 없어. 그만큼 떳떳하다구. 노인네가 귀찮아 질 무렵에 마침 고국 나들이 할 기회가 생겼으니 그걸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겠지. 그 기분 나도 알아, 이제사 말인데 나도 시집 식구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영어 잘하는 남편한테 기회도 많고 여자들 살기 좋은 그 좋은 땅 버리고 한국에서 새롭게 기반을 닦았으니까. 왜 이래. 나도 그런 여자라구. 자네가 나한테 미리 자네 속셈을 넌지시 귀띔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막 나가진 않았을거야. 자네가 본데없이 자란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맹랑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그려. 설사 웬수지간이라도 남의 개혼에 어떻게 그 흉측한 수의를 얹어 보낼 생각을 하냔 말야. 난 그게 분하단 말야. 어머님이야 여적지 부려먹은 사람들한테로 가시라고 비행기 태워드리면 그만이지만, 자넨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귀한 아들 혼사에 수의 보따리를 안동을 해서 보냈냐구? 말해 봐. 그게 아니면, 미국서 오래 살면 남의 경조사에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게 있다는 것도 몰라도 되는 줄 아나? 덮어놓고 다 아니라니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나는 자네 꿍수에 넘어갈 사람은 아닐세.“

 

내가 듣고 있다는게 민망했던지 조카가 느닷없이 눈을 부라리며 제 댁한테서 수화기를 낚아채 소리나게 내려놓으면서 고함을 쳤다.

"그만 닥치지 못해. 당신이야말로 자식들 앞에서 할 소리가 있고, 해서 안되는 소리가 있다는 것도 몰라?"

"느이 어머니 잠드셨다. 시차 때문에 고단하신가보더라. 하룻밤 모시고 자면서 회포를 풀려고 했더니 안되겠다, 가봐야지.“

나는 총총히 그 자리를 피했다.

아무도 나를 붙들지 않았다.

나도 알토란 같은 내 손주 새끼들과 효자일 것도 불효자일 것도 없는 아들 며느리가 있고, 기회만 있으면 나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딸자식도 있는 몸이었다.

제까짓 것들이 붙들지 않는다고 아쉬을 거 없었지만 앞으로 뭔 일을 당할지 첩첩태산인 언니 생각을 하면 뒤꼭지가 당기는 듯하여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식구들 몰래 내 방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요금을 그쪽 부담으로 하려면 암만해도 조카보다는 조카딸들이 만만했으므로 LA교외 라구나 비치에 사는 큰조카딸한테 전화를 걸었다.

 

질부도 맨 먼저 거기다 전화를 한 듯, 조카딸은 여기서 일어난 일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왜 그렇게들 야단법석인지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큰올케는 다짜고짜 나한테 엄마 짐에 수의가 들어 있는 것도 몰랐냐고 시비를 거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는 샌프란시스코 작은 오빠네서 떠나신걸. 난 엄마한테 축의금만 보냈지 배웅도 안했어. 알았어도 그렇지. 엄마가 갖고 가고 싶으면 갖고 가는거지 그걸 우리가 왜 말려야 돼. 수의는 죽어서 입자고 하는 옷이잖아. 엄마는 만약 한국 나갔다 돌아가시는 일이 생기면 그걸 입고 싶었나보지 뭐. 그게 거기 사는 아들 며느리 짐을 덜어주는 일도 되구. 살아 생전에 수의를 장만하는 마음이 바로 그런 거 아니겠수. 꼭 돌아가실 날 받아놓은 것처럼 윤달 낀 해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자식들한테 보채다시피 해서 장만한거거든. 그거 얼싸나 비싼 건데. 처음엔 여기 올케한테 구걸하기 싫어서 나혼자 했었어. 소문보다 싸더라구. 여기 노인들도 윤달 든 해엔 수의 장만하는 게 유행이라 값도 빤해. 교포사회가 좀 살만해졌거든. 그래서 남 하는 대로 했는데 엄마가 중국베라고 시뜻해하시면서 당신은 꼭 한국산 안동포로 하고 싶다는 거야. 엄마가 우리한테 어떤 엄만데 그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수. 그래서 내가 해드린 건 좀 못사는 노인에게 선물하기로 하구 다시 추렴을 해서 그 안동포라나 뭐라나 하는 최고로 비싼 베로 새로 해드린거야. 엄마가 애착을 가질 만하지 뭐. 근데 왜 난리들이야. 이모도 알다시피 LA가 얼마나 더운데유. 그래도 겨을 한철 좀 서늘할 때면 밍크입고 나오는 노인들 더러 있다우. 나도 밍크 있다 이거지. 애교스럽지 않아. 엄마의 수의도 그렇게 애교로 좀 봐주면 안되냐구?"

조카딸 얘기를 듣고 보니 언니의 수의에 그닥 큰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질부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넘겨짚은 건 수의가 주는 이미지의, 경사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그 생급스러움, 사위스러움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밍크코트하고 수의하고 비교가 가능한 조카딸한테 사위스럽다는 우리 마음속의 해묵은 그늘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나는 암만해도 느이 엄마 여기 오래 계실 것 같지 않다는 소리만 하고 조카딸하고의 통화를 끝냈다.

 


그러나 언니의 수의 소동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언니가 온 지 며칠 안돼 신부집에서 예단이 왔다고 보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신랑집의 집안네가 다 외국에 있으니까 접어두고, 직계만 하라고 했다는데도 나한테까지 예단이 왔다는 것이었다.

언니하고 나하고는 같은 천의 아름다운 비단이었는데 언니는 두루마깃감까지 있고, 나는 치마저고릿감만 있었다.

알맞은 차별이어서 호감이 갔다.

언니는 연분홍빛이고 나는 황금빛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옷감을 풀어서 언니의 어깨에 걸쳐 보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 어울리는 색깔을 골랐을까 라고 사돈댁의 안목을 치하해 마지않았다.

언니도 오래간만에 기죽을 펴고 활짝 웃더니 벌떡 일어서서 큰 거을 앞에 섰다.

그리고 한복 어깨로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 그 고운 비단을 걸쳐 보였다.

고급비단 특유의 우아한 주름과 속삭임 같은 살랑임에 우리는 그동안 어긋났던 마음이 편안히 녹아드는걸 느꼈다.

 

그러나 거을 속의 자신의 모습에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언니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정말 너무 엉뚱했다.

"이런 옷감으로 수의 했으면 참 좋겠다. 그치?"

언니는 희고 아득하게 웃으며 가물가물한 소리로 우리의 동의를 구했다

나도 섬뜩했으니 질부가 노발대발한 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예단이 만들어준 모처럼의 화해의 틈서리에 끼여들어 오늘밤이야말로 언니하고 함께 자리를 나란히 회포를 풀어보려던 생각을 단념하고 쫓기듯이 조카네를 떠나야 했다.

내 몫의 예단에다가 바느질삯이 든 봉투를 얹어주는 질부를, 암만해도 노망기 같으니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느냐고 다독거렸다.

“나도 따로 알아봤는데 느이 시누이나 시동생은 노인네를 여기 떠맡길 생각 추호도 없더라. 거기 애들이 특별히 효자라서가 아니라 노인네 앞으로 나오는 돈이 충분하고 병이 들어도 병원비 걱정도 없는데 뭣하러 그런 혜택을 안 받겠냐고 하더라. 나도 미국에 대해선 좀 아는데 거긴 나라가 효자야. 여기서 여생을 보내려고 오신 거 아니란 거 하나는 확실하니까 괜히 지레 겁먹지 말고, 계실동안 잘 해드려. 결혼식만 끝나면 오래 계시지 않도록 나도 거들테니까.”

이 정도로 질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질부는 수의라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지 결혼식 날도 시어머니한테 그 예단으로 옷을 지어드리지 않았다.

언니는 옥색 옷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언니는 한 달 가량이나 별탈 없이 아들네서 잘 지냈다.

내가 미국 가서 언니한테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마땅히 나도 언니를 우리집에 청해 단 며칠이라도 같이 지내고, 운전 잘하는 딸한테 부탁해서 시골바람도 좀 쐬게 해드리는게 도리인 줄은 알겠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기 며느리 눈밖에 난 언니가 내 며느리 눈밖에는 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안 딴사람처럼 표정이 어둡고 거칠어진 질부만 봐도 언니가 얼마나 달값지 않은 짐이라는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후 내가 앞장서서 언니를 마치 고약한 짐 부치듯이 황황히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사건이 또 한번 생겼는데, 수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수의보다 훨씬 해괴한 사건이었다.

 

빨리 좀 와달라는 질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언니는 난만한 낙화 한가운데 사뿐히 앉아 있었다.

하필 사돈집에서 보내온 예단을 밤새도록 싹둑거렸을 것으로 보이는 분홍꽃 이파리들은 찍어낸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서 언니의 요망스러운 짓거리에 괴기감을 더했다.

언니는 그 옷감이 피륙일때 몸에 걸쳐 보일 때처럼 하얗게 바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언니, 정말 왜 이래? 겁에 질린 소리로 부르짖으며 언니를 부둥켜안았다.

또 무슨 광기가 분출할지 모르는 언니의 몸은 그러나 재만 남은 뜬숯처럼 가뿐했다.

한줌의 바람을 안은 것 같은 허망감에 소스라치며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이래도 나만 나쁜 며느리냐고 질부가 나를 쏘아보며 대들었다.

나는 그런 질부가 정 떨어졌지만 질부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질부 편을 든다는 것은 질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언니를 미국으로 보낼 수 있도록 주선하는 거였다.

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카 보다는 조카딸이 만만해서 전화로, 너희 어머니가 가시고 싶어해서 어느날 몇시 비행기 태워드린다고만 말했고 조카딸은 알았어, 이모. 하고는 바쁜 듯이 전화를 끊었다.

그뿐이었다.

내가 했으니까 그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이 됐지 질부가 했으면 아마 이러쿵저러쿵 훨씬 더 곱잖은 소리가 오갔을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마지막 만난 언니는 입국할 때와는 딴사람처럼 고상하고 품위있어 보였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옥색 한복에다 흰 버선에 고무신까지 갖추어 신고, 그동안 자란 머리를 깔끔하게 얹어 빗은게, 언니의 작달막한 키와 나부죽한 어께선에 잘 어울렸다.

짐도 루이뷔똥 가방만 그대로고, 구럭 같은 이민가방 대신 제대로 된 새 여행가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큰 가방을 두개나 더 장만한 걸로 보아 그쪽에 사는 시동생 시누이들한테 줄 선물도 충분히 해 보내는 것 같았다.

우애는 별로라도 그 정도의 허영심은 있는 질부였다.

“미국물이 좋다지만 늙은이한테는 한국물이 좋은가보다. 몇 달 안되는 동안 느이 시어머니 어쩌면 저렇게 귀티가 잘잘 흐르냐?”

나는 질부에게 이렇게 아부 겸 치하의 말을 했다.

어찌됐건 그동안 별난 시어머니를 그만큼 잘 참아낸 끝에 호사까지 시켜서 무사히 떠나보내는 질부가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출국장 앞에서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서양식으로 알싸안고 볼도 비비며 작별을 아쉬워하는게 어색하지 않고 보기 좋았다.

나도 남들이 하는대로 언니를 포옹했다.

언니에게도 전송나온 식구들은 남부럽지 않게 여럿 됐지만 끌어안고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동기는 나밖에 없구나 싶은 게 뭉클하니 내 눈시울을 자극했다.

언니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질부는 시어머니가 싹둑거려놓은 한 바구니나 되는 꽃잎을 다 압수한 줄 알았는데, 어젯밤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면서 보니, 루이뷔똥 가방 속 안동포 수의 갈피갈피에 흩뿌려놓은 것처럼 아직도 많은 꽂잎이 숨겨져 있더라고 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질부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인 마지막 시어머니 흉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떠했니?”

나는 숨가쁘게 물었다.

“어떡허긴 어떡해요. 그냥 못본척 했지요.”

“그래 잘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고 싶게 안도하면서 태워다주마는 조카를 뿌리치고 버스정거장으로 향했다.

언니의 이상한 행동을 고자질할 때마다 악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불길하고 영물스러워 보이는 질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두 달도 안 돼 언니의 부음을 들을 줄이랴.

그래도 그렇지 두 달이 어디 짧은 동안인가.

그렇게 보내놓고 어쩌면 그동안 한 번도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궁금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나저제나 그쪽에서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을 뿐 먼저 전화나 편지를 쓸 엄두가 안 났다.

나쁜 소식을 듣는다 해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은 일종의 무력감, 무소식은 희소식으로 덮어두고 싶은 소심증 때문에 아예 알고 싶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항으로 언니를 마중 나오기로 한게 큰 조카딸이었으니까 아마 언니를 끝까지 모신 것도 그애였을 것이다.

내가 언니 보러 미국 갔을때마다 제일 잘 해주고 유복하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묵을 수 있는 곳도 그애네 집이었다.

미국서도 제일 부자동네라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산동네같은 지형에 기화요초로 정원을 가꾼 집들이 드문드문 흩어진 그림 같은 동네였다.

조카딸네는 맨 아래 마당이 바로 바닷가로 면한 집이었는데 천평은 됨직한 마당 끝에 서면 절벽 아래로 바다가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갈기를 세운 맹수의 공격처럼 사납고 무시무시해 보였다.

언니한테 안 무서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태평양인데 뭐가 무서우냐고 했다.

태평양이면 왜 안 무서울까? 그것까지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한번은 언니하고 온종일 그 동네를 한바퀴 돈 적이 있다.

세상에, 세상에, 꽃도, 꽃도 어찌나 많고, 모든 꽃들이 바로 지금이 제철인양 어찌나 진하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지 식물원이 따로 없었다.

 

버려진 공터나 낭떠러지에 물결치고 있는 노란 야생화는 멀리서 보면 한창 철 만난 유채꽃 같은데 야생 겨자꽃이라고 했다.

그 동네엔 유명한 영화배우도 살고, 돈 맣은 변호사도, 은퇴한 고관들도 산다고 언니는 일일이 그런 집들을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알은 척을 했다.

세상에, 경애 신랑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길래, 한국 사람이 이런 동네서 살 수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감탄을 하면 언니는 속도 없이 이 동네 사는 한국 사람은 그렇지도 않다면서 저기 저 대문이 네 개에다 풀장이 두 개나 되는 집은 한국에서 부도내고 도망 온 누구누구네, 저기 지금 한창 수리중인 성 같은 집은 몇년 전 신문을 떠들썩하게 한 빠찡꼬계의 주먹대장 누구누네 집 하는 식으로 알은척을 계속했다.

잘사는 동네답게 동네를 휘감아도는 길도 구렁이 잔등처럼 능글능글 기름쳐 보였지만 차의 통행은 어쩌다가 볼 수 있었다.

그날 언니는 유난히 즐겁고 의양양해 보였지만 밤에는 둘이서 똑같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그건 고단한 순례였다.

그렇게 온종일 다리품을 파는동안 어쩌면 동네사람이건 행인이건 걷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못 만난 것일까.

언니는 손가락질하며 알은 척한 집에 정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그런 사람이건 저런 사람이건 그 동네가 사람 사는 동네라는게 맞기나 할까.

언니의 부음을 듣고 나서 왜 줄창 그런 의심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큰조카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지 싶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힐 무렵 먼저 조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질부를 거치지 않고 조카가 직접 전화하기는 드문 일이었다.

회산데, 장례 치르고 와서 첫 출근이라 자연히 이모님 생각이 난다면서 차 보낼 테니 나오시면 점심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점심이 급한 게 아니라 할 얘기가 급한 것 같은 눈치에 사양하지 않았다.

여자형제끼리는 늙을수록 닮아가는 법이고, 그게 그 자식한테는 곧잘 상실감을 달랠 수 있는 구실이 된다는 걸 나도 경험해 봐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러운 일식집은 그의 단골집인 듯 친절하고 공속하게 안내된 정갈한 방엔 조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양손으로 따뜻이 보듬으며 반겼다.

질부 앞에서라면 감히 꿈도 못꿀 친밀감의 표현이었다.

전골냄비의 야채와 어우러진 고기맛은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그러나 좀처럼 식욕은 일지 않았다.

조카도 전골국물보다는 따끈하게 데운 정종잔을 더 자주 훌쩍이면서,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더라구요. 정신 놓은 노인들을 위한. 그런 노인들이 더 오래 산다는데 어머니가 그런 데서 돌아가신 걸 갖고 한번 뗑깡을 부렸더니, 장례 치르고 나서 경애년이 글쎄 이런 얘기를 해주지 뭐예요. 경애가 알고 있는 일을 왜 저는 몰랐을까요? 하긴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말예요. 제가 어머니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왜 이렇게 슬플까요. 이모님.”

평소 과묵한 그답지 않게 이야기는 주절주절 계속됐다.

나는 어느 틈에 조카하고 마주 앉은게 아니라 언니하고 마주 앉아 옛날 얘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