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속의 가시 - 박완서 (상)
아침에 언니의 부음을 받았다.
언니가 미국으로 쫓겨간 지 두 달도 채 안돼서였다.
나는 당장 상가로 달려가야 할 것처럼 영안실이 어디냐고 황황히 물었다. 그건 웃기는 질문이었나보다.
질부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언니가 여기 어디가 아닌, 미국땅에서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그렇지, 웃음이 나오다니.
전화기를 통해 들어서 그런지 질부의 웃음소리는 상제답지 않게 들떠 있었다.
“어딘 줄 알면 가시게요?”
“못 갈 것도 없지, 하나밖에 없는 언닌데.”
그 소리를 하면서 울음이 복받쳤다. 오남매 중 나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게 막막하고 무서웠다.
“이모님도 참, 미국이 저기 어디 부산이나 대구쯤으로 아시나 봐.”
“시방 너 있는 데는 어디냐?”
“어딘 어디예요, 반포죠. 즈이가 어디 사는지도 잊으셨나봐.”
“그럼 맏며느리도 미국이 멀어서 여적지 못 가고 있단 말이지?”
“아범이 방금 떠났어요. 비수기니까 그나마 비행기표를 구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모르겠어요. 미국은 뭘 찾아먹으러 그렇게들 드나드는지.”
“그럼 넌 비행기표가 없어서 못 갔단 소리냐?”
“이모님, 막내가 고3이에요. 고3 엄마가 어딜 가겠어요?”
질부의 목소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팽팽했다.
순간 나는 넉살 좋게 빌붙다가 떠다밀린 것처럼 움찔했다.
고3 짜리뿐 아니라 고2 를 모시고만 있어도 웬만한 법도쯤 무시하고 살아도 아무도 뭐랄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질부는 여기저기 알릴데가 더 있으니 그만 전화를 끊자고 했다.
“에미야, 그럼 난 어떡하라구? 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야아.”
난 끊긴 전화통에다 대고 이렇게 징징거렸다.
듣는 사람이 없다는걸 깨닫자 울음보다는 노여움이 치뻗쳤다.
마지막 다녀간 걸 그렇게 보내다니.
나도 언니가 서울에 와 있는 동안 살뜰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질부가 처음 모신 시어머니한테 한 짓은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언니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게 60년대였으니 30년이 넘는 셈인데 그동안 언니는 단 한번도 고국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거기서 대학 나오고 결혼까지 한 맏아들이 고국에 일자리를 구해 영구 귀국할 때도 언니는 따라오지 않았고, 그후에도 어떻게 사나 보러 올법도 한데 미국물을 떠나면 죽는줄 아는지 꼼짝을 안했다.
하긴 그 동안에 거기 눌러앉은 다른 아들딸들이 다 뿌리내리고 살만해진건 언니의 공이 컸고, 맏아들도 뻔질나게 미국을 드나들었으니까 아들 보고 싶은걸 참고 살았달수만은 없었다.
언니네가 이민갈 때 고등학생이었던 맏이는 영어와 모국어를 거의 똑같이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했고, 그로 인해 발탁된 일자리니만치 1년이면 서너 달은 외국에서 보냈다.
나처럼 자식들이 외국물과는 인연이 먼 사람에게는 질부가 제 남편이 비행기 때문에 골병들고, 비행기 음식 때문에 위장 버렸다고 안달을 하는 소리도 은근한 자랑으로 들렸다.
우리집에선 내가 그래도 언니 덕에 외국바람을 가장 많이 쐐 본 사람이었다.
언니하고 사는 거리와는 상관없이 정이 날로 애틋해져 전화도 자주 걸게 되고, 언니가 불쑥 비행기표를 보내주면 즉시 날아가서 한두 달씩 머물다 오기도 했다.
물론 언니네가 그쪽에서도 잘사는 축에 들고 나서였으니까 최근 10년 사이의 일이었다.
언니의 30여년 만의 귀향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었다.
지금 고3짜리하고는 10년이나 터울이 지는 그 집 맏아들은 언니가 미국에서 받은 첫손주이자 장남이었다.
올 봄 그애가 결혼할 때 다녀간게 언니의 마지막이자 첫 고국 나들이었다.
언니가 도착하던 날 나도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울긋불긋한 잠바조각하며, 곱슬곱슬한 머리 위로 올려붙인 선글라스하며, 샌들을 신은 맨발에 시뻘건 매니큐어하며 칠십대 노인의 차림치고는 촌스럽다기보다는 상스러웠다.
부조화스럽기는 언니가 밀고 나오는 짐도 마찬가지였다.
얼룩지고 낡은데다가 솔기에 테이프까지 더덕더덕 붙인 구럭같은 이민가방하고 상표도 안 뗀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루이뷔똥 새 여행가방은 암만해도 잘 안 어울렸다.
그러나 곧 그 금빛 장식도 은은한 가방은 언니의 생뚱스러운 차림에 대한 우리 모두의 민망한 마음을 씻고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장손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는 30년 만의 귀향이 아닌가.
언니가 조르지 않았어도 미국에서 잘사는 삼촌과 고모들이 결혼식에 오지는 못하나마 선물이 없을 수 없었다.
그 가방은 추레한 이민가방과의 도드라지는 차별성 때문에라도 선물가방이라고 써붙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에다 가방을 실을 때의 언니의 표정만 봐도 거기 값지고 좋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큰아들네서 짐을 푼 언니는 그러나 이민가방만 풀고 그 고급스러운 새 가방에 대해서는 누가 물어볼 엄두도 안 나게 이상하게 굴었다.
신주단지라도 든 것처럼 아이들 발길에다 차여도 언짢아하다가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미리 발뺌을 하면서 구석빼기로다만 밀어붙이려드는 게, 영락없이 장물아비 장물 끼고 돌듯 떳떳지 못해 보였다.
언니가 여봐란듯이 풀어놓은 이민가방에서 쏟아져나온 선물들은 더군다나 그 새 가방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봉다리에 든 인스턴트 커피가 스무 개도 넘었고 대만제 싸구려 립스틱은 그보다 더 여러 개였다.
흔해빠진 랑콤 콤팩트가 그래도 그중 값나가는 물건 축에 들겠는데 그건 몇 되지도 않았다.
그밖엔 언니 옷들인데, 왜 그렇게 울긋불긋 너절한 것들뿐인지 내가 괜히 민망했다.
눈치도 없이 그까짓 봉다리 커피를 가지고 나눠줘야 할 사람들을 기억력도 좋게 사돈의 팔촌까지 엮어대면서 몫을 짓는 언니 곁에서 나는 질부와 눈을 맞추면서 "우리 언니 몰라도 뭘 너무 모른다 잉." 일부러 잘할 줄도 모르는 사투리 억양까지 써가면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언니가 이민갈 때만 해도 미제라면 그저 커피 한 봉지라도 감지덕지할 때였다.
요새 웬만한 집에서는 다들 원두커피지 인스턴트 커피는 잘 마시지도 않는다는 것을 언니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내내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던 질부의 표정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번졌다.
암말 말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내가 눈치로 질부를 다독거리고자 한 것은 아직도 그 새 가방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 깊고 깊은 이민가방 속을 충분히 다 뒤지고 나서, 뒤져낸 선물의 수효와 자신의 기억력과 맞춰보느라 손가락까지 다 동원했다.
뿌르르 부엌으로 나간 질부가 식사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팬 돌아가는 소리와 굴비 굽는 냄새가 끼쳐왔다. 5만원 짜리 굴비를 굽고 있을까.
언니가 없어도 나에겐 1년에 한두 번씩은 조카네 들를 일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이 시이모에 대한 질부의 대접은 깍듯하고도 융숭했다.
귀한 음식도 아낌없이 내놓았다.
커다란 굴비를 통째로 구워준 적도 있는데 한 마리에 5만원도 넘는 진짜 영광굴비라고 했다.
식탁은 푸짐했다.
김치만 해도 몇가지나 됐고 갈비찜이며, 잡채며 전유어며 잔칫상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언니가 미국서도 실컷 먹던 거라는걸 난 알기 때문에 얼른 굴비를 언니 앞으로 밀어놓았다.
"언니, 이 굴비 좀 잡숴봐요. 한 마리에 오십 달라도 넘는 진짜 영광굴비라우. "
아이구머니 하늘 무섭다. 이까짓 조기 한 마리에 뭐 얼마라구? 미국선... 언니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으며 굴비접시를 멀찌거니 밀어놓았다.
"언니, 미국서 잡히는 건 조기 아냐, 그건 부서지. 영광굴비에다 그까짓 부서를 어떻게 갖다대우"
그러나 언니는 미국 조기가 더 진짜지 한국 조기는 중국서 건너 온 거라고 우기고 나서, 마치 살림재미에 돈독이 잔뜩 오른 여편네 처럼 그쪽 물가가 얼마나 싸다는 걸, 무 배추에서 마늘 파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기억해냈다.
외국살이하다 온 사람들한테서 흔히 듣던 소리건만 질부의 과장되고 냉랭한 무관심 때문에 마치 고부간이 맹렬히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싸움을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명감으로 나는 숨이 가빠왔다.
내가 주책을 부려서라도 화제를 딴데로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언니 , 왜 그 루이뷔똥 가방은 공개 안하우? 나 가고 나면 식구 끼리만 열어보려구? 언니 그럼 못써. 보나마나 손주며느리한테 줄 예물일 텐데, 그치? 삼촌이나 고모들도 뭐 한가지씩 해보냈을 테구. 그런 건 자랑하는 거야. 그래야 장만해준 아들딸들도 낯이 서지. 그거 못 보면 나 오늘 집에 안갈테니 그런줄 아슈"
"이모님두, 안 그러면 오늘 가시려고요? 장우 결혼식이 며칠 남았다구요? 그때까지 여기 계셔요. 두 분 회포도 실컷 푸시고 함 보낼 때 격식에 어긋나지 않게 이것저것 참견도 해주셔야죠."
질부의 표정이 단박에 배시시 풀어졌다.
질부는 이렇게 다루기에 따라서는 싹싹하고 뒤끝도 없었다.
며느리까지 보게 됐으니 같이 늙어가는 처지건만 제법 늙은이 위할 줄도 알았다.
질부나 나나 그 가방이 궁금한 것은 호기심하고도 다른, 얼른 짚고 넘어가서 개운해지고 싶은 께름칙한 그 무엇이었다.
언니가 아이 참, 하면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식사중에 보자는 소리는 아니었다고 말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언니가 휭하니 식당으로 가져온 것은 두툼한 봉투였다.
"그러잖아도 다들 있는 데서 내놓을 참이었다. 느이 시동생하고 시누이들이 제법 큰 부주 했다. 뭘 하나씩 맡아서 해주고 싶다고 의논들을 하길래 신랑 쪽이니까 그럴 것 없이 돈으로 하라고 내가 옆에서 훈수를 뒀다. 안 그러냐? 돈이 젤이지. 얼마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길래 액수도 내가 정해뒀다. 백주에 강도 같았을 거야, 천 달라씩 내놓으라고 공갈을 쳤으니까 걔네들은 이제 양키 다 됐어. 웬만한 양키는 지 아들이 혼인해도 천 달라 안 내놓을걸, 얼마 나들 짠데.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근본이 있는 아이들이니까 두말 안하고 내놓더라."
언니에겐 그 쪽에 삼남매가 더 있으니까 그 돈은 3천불은 될 것이다.
물건으로 뭘 해보낸다고 해도 그 이상 가는걸 해 보낼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쪽 조카들 집도 다 한번씩 가보아서 알지만 다들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것 같아도 다 빛덩어리라고 했다.
은행 빛이라고는 하지만 하다 못해 학비까지 빛이라니 속 빈 강정처럼 사는 건 거기 사정이나 여기 사정이나 별로 다를게 없다 싶었다.
그런 자식들한테 말이 조카지 왕래가 있고 정이 든 것도 아닌 순전히 관념적인 조카를 위해 천불씩이나 짜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니가 의기양양해 할만했다.
질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과용들을 해서 어떡하나? 하면서도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 가방은 뭔가? 돈봉투 때문에 잠시 흐려졌던 관심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언니가 그 가방을 구석빼기로 처박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존재는 정체 모를 손님처럼 이 식탁에 끼여앉아 우리의 신경을 지속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느낌은 질색이었다.
질부도 같은 생각이라는 게 이심전심으로 느껴질수록 질부에게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축의금 봉투가 출현하고부터 다들 입맛을 잃었는지 숟가락을 놓았다.
언니만이 누구 약을 올리고 싶은 건지 오래도록 못마땅한듯 반찬접시를 께적거리면서 식사를 계속했다.
맨 나중까지 수저를 붙들고 있는 언니 때문에 나는 자꾸 식구들 눈치가 보였다.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이치가 닿지 않는 미안감에 떠다밀리듯이 불쑥 또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언니, 그만 먹어. 이제 그만 먹고, 남은 짐이나 풀릅시다. 궁금 해 죽겠네."
"다 풀렀잖냐? 가방 맨 구석빼기 속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온 돈봉투까지 꺼내다 광고를 쳤으면 고만이지 뭐가 또 궁금한 게 남아 있냐?"
언니는 일부러 굼뜨게 수저를 놓으며 나를 나무랐다
"새 가방을 아직 안 풀렀잖우?"
"그 안엔 아무것도 없어, 봐야."
"그럼 빈 가방이란 말유?"
"아니, 그건 아니고 미제는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았다구..."
언니는 다시 장물아비처럼 떳떳지 못하게 우물거렸다.
"언니두, 우리가 뭐 미제에 걸신이 들린 줄 알우? 미제면 어떻구 중국제면 어떠우. 언니가 신주단지 위하듯 하는게 뭔지 그냥 보자 는 거지."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자꾸나."
언니가 식탁에서 일어서 자기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나는 뒤따르면서 나도 모르게 고약한 일에 말려든 것처럼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장난스러운 호기심 정도였는데 왜 이렇게 심각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집 분위기 탓이라고, 몇십년 만에 노모를 맞는 태도치고는 은근하거나 따뜻한 배려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조카네들 하는 짓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는 변명을 궁리했다.
허섭스레기를 넣어두던 곳을 대강 치운 빈방이라 제물장 속도 어수선했다.
어느 틈에 거기 넣어두었는지 루이뷔똥 가방은 그 안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었다.
언니가 손수 그걸 꺼냈다.
뒤따라온 식구들이 둥글게 에워싼 한가운데서 언니는 답답하도록 느리고 서툴게 가방을 열었다.
마치 가방 밑에 용수철이라도 장착된 것처럼 안의 것들이 둥실 부풀어올랐다.
대나무 숲을 스친 미풍 같은 상쾌한 소요와 함께 그것들이 코끝까지 부풀어 오를 것 같은 환각 때문에 우리는 다들 비명을 억누르며 뒤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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