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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Joyfule 2017. 12. 23. 20:45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몇 마디 답을 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남들이 쓴 글이나 하는 말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인생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체험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많건 적건 공자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데, '논어'라는 책에 보면 그 어른은 자기의 삶에 몇 가지 단계가 있었음을 밝혀 두었다.

 

"나이 열하고 다섯(15세)에 배우는 일에 뜻을 두었고, 나이 서른(30세)이 되어 바르게 섰고, 나이가 마흔(40세)이 되면서부터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 쉰(50세)이 되니까 하늘의 뜻, 하늘의 명령이 내 귀에 들려 왔고, 60세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남의 뜻에 순종할 줄도 아는 여유 있는 인간이 되었으며, 칠십 고개에 올라선 뒤로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법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공자님은 정말 대단한 스승이셨다.

'자서전'이니 '이력서'니 하는 제목으로 몇 권의 책을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자님은 불과 서른일곱 글자를 가지고 70여년의 자신의 삶을 요약하신 것이 아닌가.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이 종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은 대개 50대가 되어서인 듯하다.


그 나이가 되어 귀를 기울이면 하늘의 명령이 한마디 들려온다.

"내가 너를 불러 갈 날이 멀지 않았으니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그런 한마디 하늘의 명령을 듣지도 못하고 살다 가는 사람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들의 실천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이생과 저승을 연결 지어 줘야 하는 종교의 자리를 유교는 굳히지도 않았고 굳히려 하지도 않았다.

유교가 사명감에 불타는 선교사나 전도자를 배출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교는 특히 어떤 시대의 개인적 윤리나 도덕, 국가적 정치나 통치 이념으로 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유교를 신봉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 불교는 어떤가.

내가 자란 평양에는 모란봉 기슭에 영명사도 있고 불교에서 경영하는 초등학교도 있었지만 나와는 아주 인연이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불교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의 인생의 대부분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무슨 일로 교도소에 갇혀서 한동안 살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어떤 후배가 내 감방에 '반야바라밀다심경'이란 얄팍한 책자를 한 권 넣어주었는데 나는 그 책을 수백 번 읽으면서 불교라는 종교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때 무종교의 입장에서 그 글을 읽었더라면 나는 출옥하자마자 머리를 깎고 세상을 등지고 입산수도의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유산처럼 물려준 그 믿음, 그 삶을 떠날 수도 없고 배반할 수도 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던 때 아버지는 맹산군 원남면의 면장이었다.

위로 누님 하나, 형님 하나 있었고 정말 남부럽지 않은 단란하고 풍요로운 삶이었다.

아버지가 계속 면장 일을 보셨으면 우리는 편안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어떤 사람의 꼬임에 빠졌는지, 면장 일을 그만두고 광산에 손을 대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집안의 몰락과 시련의 시작이었다.

논밭을 팔아 넣고, 심지어 집을 팔아 넣고도 광산은 실패했다.

사람은 한번 광산에 미치면 가족을 돌볼 생각도 안한다.

젊은 어머니는 그 시골에서는 살 길이 전혀 없었다.

어린 것들 손을 잡고 평양으로 나오셨다.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고,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30세 전후의 젊은 주부. 철없는 아이들은 이거 사 달라, 저거 먹겠다. 하면서 졸랐겠지만 돈이 없어서 사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80이 된 오늘 돌이켜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평양 가서 처음 10년 동안 이사 열네 번을 하셨다는 어머니, 엄동설한에 끼니를 끓일 쌀이 떨어지고 땔나무가 없어서 배고프고 추워 덜덜 떨며 견뎌야 했던 우리 신세. 어머니께서는 안하신 고생이 없으셨다.

남의 집 빨래도 하시고 삯바느질도 하시고 하숙도 하시면서 우리들을 키워주셨다.  

그 가난 속에서도 딸을 공장에 안 보내고 여학교에 보냈다.


평양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그 주변 경치가 좋다.

일제 때 거기에는 명월관이니 국일관이니 하는 유명한 요정들이 있었다.

그 요정들에는 반드시 '권번'이라고 하는 기생 양성소가 부설돼 있었다.

가난한 집의 어린 딸들이 거기 가서 춤추는 법, 장구 치는 법, 술 따르는 법을 배워 기생이 되게 하는 곳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누님을 '권번'에 보내라고 권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딸을 기생 만들고 좀 편하게 살라는 유혹을 다 물리치고 그 딸을 일제 때 이화여자전문학교에까지 보냈으니 얼마나 대단한 어머님이셨는가.

그 딸이 뒤에 이화여대 총장도 되고 문교부 장관도 되었던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날마다 웃으면서 사실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이었을까?

삼복더위에 어머니는 선풍기도 하나 없는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힘차게 부르시던 어머님의 찬송가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어머님이 하시던 기도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의 그 기도, 그 찬송을 들으면서 우리는 자랐다.

그 신앙을 본받아 사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불교를 존중하고 유교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한다.

인생을 정직하게 살며 이웃에게 인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라고 하는 그리스도를 만났고

나는 그를 통해 나타내신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고 끝 날까지 살 것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신 그 말씀을 믿는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신 그 말씀도 또한 믿는다.


나는 유교 신자가 될 수 없고 불교 신자도 될 수 없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그 말씀대로 나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셨음을 나는 확신한다.


누가 나에게

"당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에게는 분명한 대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사실입니다"라는 한마디 대답이 있을 뿐이다.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