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옥에 떨어졌었습니다.
조용기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2008. 2. 3. 성찬주일설교 중에서)
지옥은 자살하려고 해도 죽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얼마나 내 자신이 밉든지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칼이 있으면 찔러서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저주스럽고 혐오스러워도 지옥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가 있으면 큰 축복이지요. 죽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자기가 자살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한 미움이 하늘에 사무치니까 살수가 있어요? 이 세상에도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것처럼 지옥에는 자살을 할 수 없으니까 괴롭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9장 48절로 49절에 예수님께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 말이 난 무엇인지 몰랐는데 죽는 것이 없어요. 구더기 같은 죄악의 죄책이 꺼지지도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도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고함치고 몸부림치며 소금 치듯합니다. 몸부림칩니다. 저도 막 몸을 비틀고 그냥 앞으로 엎드렸다가 뒤로 누웠다가 옆으로 기었다가 자빠졌다가 온갖 짓을 다 해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지옥에서 회개나 후회나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할 수 없고 후회하려고 해도 후회할 수 없어요. 시간이 중지된 곳이라 과거의 일을 회개할 수도 없고 후회할 수도 없어요. 세상에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고 후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회개도 못하고 후회도 못하므로 자기의 상황이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할 사람은 이 땅에 있을 때 회개해야 돼요. 지옥에 들어가면 회개할 줄 알아도 회개가 없고 후회가 없어요.
히브리서 6장 6절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지옥에 들어가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그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데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은 조금 지옥의 가장 맨 밑바닥에서 떠있고 그 죄의 중량에 따라서 흡입력이 달라요. 큰 죄는 강한 흡입력으로 끌려 들어가고 적은 죄는 좀 더 중간에 있지만 고통은 다 똑같아요.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버림받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절망, ‘나는 버림 받았다!’ 그것이 영원 속에 꽉 들어찼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이웃에게 버림받고, 전혀 내 자신에게도 버림받고, 보통은 아무리 버림 받아도 자기가 자신을 버리지 않지 않는가. 자기 자신은 자꾸 보호하고 변명하는데 그것도 없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 전적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몹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로 28절에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을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버림받은 그의 기도를 들어줬습니까? 단호하게 “No!”했습니다. 버림받은 처소인데요. 기도가 무엇이며 응답이 무엇입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로 9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영원한 형벌의 멸망이라니까 하루 이틀의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 왜냐면 시간이 없는 것 지옥은 시간이 중지된 곳이니까 그 고통은 하루 이틀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인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 고통 자체 속에 존재하는 삶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죠. 좀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 좀 나아질 것이다. 좀 지나면 변화가 올 것이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 극한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절망과 그 좌절과 그 버림받은 심령과 그 괴로움은 도저히 말로써 표현 못합니다.
저는 그 때 느낀 것은 뭐냐면 ‘정말 지옥 갈 바에야 안 태어난 것이 좋다. 지옥에 가서 자살이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데 살아 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미꾸라지에 소금 치듯이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것이 한 두 시간 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지옥 불에 타면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태양이 항상 공중에 떠있어 수억만년 동안 저렇게 불빛을 내는 것처럼 억만년 동안 시간 없이 속에 죄가 불타는 것입니다. 왜, 죄를 씻을 보혈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는 영원히 타는 원자핵과 같아서 끌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이 세상에 예수님 보혈로 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혈이 없는 곳에 죄를 끌 수가 없으니까 영원히 불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자체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정말 몸서리치는 곳이 지옥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첫째 육체가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지옥에 떨어진 것은 둘째 사망으로써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희랍 신화에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물 중에 탄탈로스와 시지프스가 제일 유명합니다. 왕이었던 탄탈로스는 지옥에서 목까지 잠기는 물속에 서 있는데 바로 코 밑에 먹음직한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탄탈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목을 굽히면 물은 순식간에 땅 밑으로 쫙 빨려 들어가고, 과일을 따먹으려고 손을 뻗치면 나뭇가지는 바람에 날려 휙 하늘로 올라가고 탄탈로스는 바로 코 앞에 물과 맛있는 열매가 있지만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소원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소원이 눈꼽만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지프스는 알베르 까뮈가 소설에도 묘사했는데, 고린도의 왕으로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지옥에서 시지프스는 가파른 비탈길 저 아래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데 있는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겨우 밀고 올라가면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다시 온 힘을 다해서 이 바위를 밀어 올리면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바위는 또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지프스는 영원히 이 일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말하면 영원한 고통인 것입니다. 벌써 성경이 오기 전에 희랍 신화에서도 지옥을 묘사할 때 이런 고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탄탈로스와 시지프스가 당하는 고통과 같이 영원히 고통 그 자체 속에 존재하는 삶으로 몸서리 처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저는 일생을 목회하면서 지옥에 대한 설교를 별로 안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지옥도 있을 만하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났어요. '뭐 불타면 좀 피하면 안 되겠나. 벌레가 우글거리면 벌레를 좀 피하면 되겠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했는데 제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져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말로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에 가지마라고 경고해야 되겠다.’ 불타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지을 때는 이 세상에 일종의 환락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나중에 엄청난 지옥으로 끌려가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보니까 큰 죄도 끌려 들어가고 조그마한 티끌 같은 죄도 결국에는 그 자력선에 지옥의 흡입력에 끌려 들어가요. 지옥은 죄를 끌어 들이는 자력선이에요. 그러므로 나 요만큼 죄 지어도 괜찮겠지? 천만에요. 오직 죄를 희게 씻어 버리고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혈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상태, 그리고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상태가 의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의 노력도 안 되고 공부로써 안 되고 수양과 도덕으로도 안 되고 고행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해서 벌거벗고 부끄러웠을 때 인간의 힘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가지고 치마를 입었지만 해가 나니 또 말라 버리고 또 앞치마를 해 입었더니 해가 나와서 말라 버리고 아무리 나뭇잎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해 입어도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반 영구적인 옷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부끄럼 없이 하나님 앞에 서고 에덴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만든 나무잎사귀로써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수양과 도덕, 고행, 종교를 가지고는 죄악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야 되는데 오늘날 그 짐승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잡았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그 가죽을 벗겼습니다. 그 옷을 공짜로 입혀 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입혀 주시니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고 지옥의 세력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옥에 안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엄청난 자력선으로 잡아당기는데 자력은 여러분, 나무나 동은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철만 끌어당기지요. 지옥은 죄만 끌어당기지 용서받은 의인은 당길 힘이 없어요. 자력선이 힘이 없어요. 예수의 보혈을 부르짖을 때 모든 지옥의 세력이 끝나므로 지옥에서 떠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이외에는 우리를 희게 하고 의롭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탁 올라오니까 제가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예수 믿고 이 세상에 사는 것보고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고달프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싫증이 나기도 하고 그랬는데, 웃기는 소리. 지옥에 잠시 갔다 나오니까 천국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천국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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