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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지음

Joyfule 2006. 7. 29. 01:56

박원순 지음.

한겨레신문사 출판.

2006년 3월 18일.

 

  우리는 흔히 스포르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법정에서 이뤄지는 재판이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법의 심판과 정의라는 칼날 위에 선채로 인간만이 가진 냉철한 이성과 이성이 맞부딪치는 재판정의 뜨거운 풍경은 손에 땀을 쥐는 흥미를 줌과 동시에 치열한 양측의 공방을 통해서 긴박감과 긴장감을 준다. 요컨대 재판이란 보는이들에게 있어서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고도의 이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흥미로운 재판 중에서도 소크라테스, 갈릴레이, 잔다르크 등 주옥같은 희대의 재판들을 뽑아서 풀어쓴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준다. 경우에 따라서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릴 수 있는 재판의 현장, 그것도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인사들의 일대재판들을 역사속에서 발굴해낸 이책은 상식의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재판기록을 읽어주는 느낌이 아니라, 그에 관련된 학설이나 논증된 사실, 혹은 흥미로운 의문점과 토론의 여지들을 독자들에게 마구마구 던져주어서, 말그대로 눈을 떼기 힘든 책이다.

  시대별로 짜여진 이책은 고대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재판으로 시작한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채로 독배를 마셨따는 당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당시 권력가들의 극단적 견제와 당대 지식인들의 변호로 요약되는 것 같다. 그 치열한 공방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취한 자세는 놀라울 정도로 확고부동했다. 마치 일부러 죽고 싶어한것 같아 보일 정도로 우직했던 소크라테스는 그가 남긴 '악법도 법이다'라는 한마디 처럼 사라졌다. 여기에는 두가지 해석이 따른다. 철학적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소크라테스는 더이상 더러운 세상에서 뒹굴고 싶지 않아 죽고자 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첫째이고, 자신의 신념과 목숨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선 소크라테스가 결국 불가피하게 자신의 신념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 둘째이다. 이 두가지 해석은 똑같아 보이지만 분명 다른 관점의 해석이다. 결과는 같았지만 두 가치사이에서의 고뇌와 의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번째 해석은 접어두더라도 두번째 해석에는 의문이 따른다. 과연 '악법도 법'인가 이다. 이 한마디는 소크라테스가 후세에 남긴 커다란 논제중 하나일 것이다. 단순히 그를 굴복시키고 싶었던 자신의 고발자들 앞에서 자신의 신념으로 맞섰던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숨과 후세에 길이 기억될 명예를 바꾸는 꼴이 되었다. 이 부분에도 의문점이 따른다. 소크라테스가 후세에 기억될 명예에 연연했을지, 아니라면 순수히 자신의 신념만을 지키고 그대가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인지,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신념이 목숨과 맞바꿀만큼 중요한 거신지, 겉으로는 굴복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속으로만 지키는 것은 가치없는 일인지 등이 그것이다. 갈릴레오는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재판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거짓 시인하고 굴복했던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남겼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후로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후세에 기억되는 위인 중 한명이 되었다. 자칫 소크라테스처럼 아까운 목숨을 버릴 수 있었지만 갈릴레오는 갈릴레오는 융통성을 발휘했고, 후에 더욱 빛이 났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고, 갈릴레오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둘의 절대적인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나의 생각은 이것이다. 자신의 신념이든 명예든 그 무엇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정신과 다른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나 갈릴레오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섰던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많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억되지 못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갖는 타당성 혹은 불합리성과 그 선택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봄이 필요할 것 같다.

  마녀사냥 역시 내가 주의깊게 본 주제중 하나였다. 자세히 접해본적 없는 이 범상치 없는 주제는 내게 예상 만큼의 충격을 주었다. 종교라는 거대한 미명하에서 펼쳐진 무지와 몽매의 끔찍한 결과물이자 인류가 가진 이성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마녀사냥은 집단적인 행동이 얼마나 큰힘을 발휘하며 그속에 속한 사람들의 판단력을 얼마나 흐리게 하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인 것 같다.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참사이지만 책에서도 언급됐듯이 언제, 어디서, 어떤 논리로 다시 펼쳐질지 모르는 거대한 사회속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기에 그 조심성과 우려가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드래퓌스 재판과 로젠버그 부부 재판 역시 비슷한 경우다. 이사례들은 권력, 냉전, 암투같은 보기만 해도 살벌한 단어들이 발휘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의 피해사례들이다. 사상이나 권력같은 큰 세력 속의 다툼에서 새우등 터지는 꼴로 거대한 암흑의 세력앞에서는 아무리 무고했던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반역 혹은 그들이 원하는 범죄의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여지껏 지켜왔던 정의, 질서, 성실, 청렴 따위의 덕목들이 커다란 암흑의 세력 앞에서는 얼마든지 무가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옳은것이라고 믿어왔던 것들로부터 한순간에 배신당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각각 그시대를 대표하는 재판들의 향연을 보면서 시기, 무지, 암투, 전쟁, 사상, 냉전 같은 한시대의 아이콘들이 재판에도 그대로 투영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더이상 거대한 톱니바퀴 같은 시대의 흐름일 뿐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도 충분히 밀접한 사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지와 시기, 정쟁등의 악덕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실현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고 대중의 참여도 많아진 지금은 이 책속의 재판들에서 보이는 잘못과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하기 쉬울테지만 역사는 반복되듯, 지금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판결과 그속에 숨은 음모들이 밝혀질 미래가 밝아오고 있다. 이를 물려받을 이들은 우리들의 후세들인즉,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남길 수 있는 정의로운 시민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