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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더욱 빛난 인물들

Joyfule 2006. 7. 28. 03:02
은퇴 후 더욱 빛난 인물들


은퇴라는 낡은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19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다가 예순 두 살에 왕위에 오른 진나라 공자 중이가 그렇다. 세계적인 복서인 조지 포먼은 은퇴했다가 다시 중년의 나이에 세계챔피언에 도전해 성공했다. 지금은 목회자이자 사업가로 다시 한 번 변신해 활기찬 인생2막을 살고 있다. 처지도 상황도 달랐던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저 나이에” “이제 와서 무슨”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든 삶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줬다.

지미 카터 - 실패한 대통령이 평화운동가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당시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썼다. 재임시절(1977~1981) ‘분쟁의 해결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정도로 지구촌 긴장해소에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79년 이란혁명 회교혁명이 발생하면서 발생한 미국인 인질사건의 군사적 해결에 실패하고, 옛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모스크바올림픽 불참 결정 등으로 시련을 겪었다.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미 대선사상 가장 큰 표차로 패했다. 실패한 대통령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재기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가로 다시 선 것이다.


그는 82년 비영리재단 카터센터를 설립했고, 전 세계 65개국 이상에 분쟁조정 센터를 세우기 위한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아이티, 중동 등 분쟁지역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조정과 중재를 시도했다.


또한 파나마 선거 감시와 보스니아휴전 중재, 북한 핵위기 중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짓기 사업인 해비타트(Habitat) 운동을 주도했다. 2002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나이 78세였다.

마이클 J. 폭스 - 인기 영화배우에서 파킨슨 병 퇴치센터 설립자로

30대와 40대 초반이라면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주인공이었던 마이클 J. 폭스도 마찬가지다. 캐나다에서 아역배우로 출발한 마이클 J. 폭스는 미국 LA로 진출해 <백 투 더 퓨처> <대통령의 연인>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그러다가 폭스는 지난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아왔으며, 이를 99년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미소년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폭스가 60살 이후에나 주로 발병하는 노인성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당시 미국사회는 상당한 충격을 쌓였다. 그러나 폭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파킨스 병을 치유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배우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스튜어트 리틀’ 등 다양한 영화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고, 2002년에는 ‘인터스테이트’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조지 포먼 - 사업가된 챔프

흑인슬럼가 불량배 출신의 권투선수 조지 포먼. 파란만장한 삶을 산 대표적 인물이다. 1974년 조 프레지어를 눕히고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그는 40연승을 하며 세계 권투계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던 중 무하마드 알리에게 패배하고, 지미 영과의 시합에서 큰 부상을 당한 뒤 은퇴한다. 그리고 성직자가 돼 목회활동과 죄수들과 불우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시 링 복귀를 선언했다. 링을 떠난 지 10년이나 지난 1987년의 일이다. 몸무게도 불었고, 기량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그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은 그는 1994년에 다시 세계 챔피언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다.


또 다른 도전은 사업에서다. 햄버거를 좋아하는 포먼은 살톤사에서 시판하는 테이블용 그릴을 본 뒤 완전히 매료됐다. 판권을 따내 동업을 시작했고, 텔레비전 쇼핑 채널에 나와 직접 홍보하면서 엄청난 판매실적을 올렸다.


2002년 포먼은 살톤사와 인세를 재계약했고, 그의 이름과 이미지 사용 대가로 현금과 주식 등 1억 3750만 달러를 벌었다. 그는 2003년에 발간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인생에서 얻은 교훈들은 모두 힘겹게 배운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 인생을(혹은 남의 인생에 대해서도) 포기하지 마라. 결국 당신은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동양 고전에서 찾은 역전스토리 - 중이, 공손홍, 위징

동양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나이를 초월해 인생 2막을 크게 성공한 경우가 숱하게 있다. 중이는 춘추시대 진(晋)의 태자였다. 그는 후계자 계승문제로 내분이 일어나자 외국으로 망명생활을 떠가게 됐다. 당시 나이가 마흔 셋. 중이는 적, 제, 조, 송, 정, 초, 위 등 숱한 나라를 떠돌았다. 그 기간이 무려 19년이었다. 그 기간을 좌절하지 않고 버틴 중이는 다시 왕위에 올랐고, 주변국들을 압도하다 일흔에 세상을 떠났다.


한 무제 시절 공손홍의 인생스토리도 드라마틱하다. 제나라 설현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옥리로 지내다가 죄를 짓고 물러나 돼지를 치며 살았다. 그러다가 공부에 뜻을 둔 것이 마흔이 넘어서다. 그의 나이 예순이 되던 때 무제가 지방의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 추천돼 관직에 올랐는데 사소한 일로 곧바로 그만두게 된다. 다시 돼지를 치던 그는 몇 년 뒤 다시 중앙무대에 올랐다. 이때부터 무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일흔의 나이에 문관 최고직위인 승상에까지 오른다.


당태종 이세민을 모신 위징은 젊은 시절 별 볼일 없이 보내다가 마흔 일곱의 나이에 정계에 등용됐다. 권력암투가 치열했던 당시 상황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만 그는 항상 직언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이세민이 황제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른 위징은 그 뒤 17년간 태종을 보좌했다. 당시 이세민과 중신들의 대화를 다룬 제왕학의 교과서《정관정요》에는 위징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조용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는 직언으로 황제를 바로잡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일닷컴/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