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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가야 할 길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5. 4. 05:55






   노년에 가야 할 길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아내가 산책길에 이런 말을 전했다.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자주 만나는 여섯명 여고 동기모임이 있대요. 그중 한 명 남편은 십년 전에 돌아가시고 남은 친구들 중 네 명의 남편이 암에 걸려 있대요. 대충 당신 또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건데 우리가 이렇게 같이 걸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인 것 같아.”

말로는 백세시대라고 하면서 한없이 잘 살 것 같아도 실제의 현실은 다른 것 같다. 칠십대 중반의 건강수명이 지나면 보통 사람들은 급속히 건강이 악화된다고 한다. 요양원의 병상에서 골골 앓으면서 지내는 나머지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몇 달 전 암으로 저세상으로 옮겨간 친구가 있다. 죽기 전 카톡으로 서로 소식을 전했었다. 이젠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카톡을 해도 반응이 없다. 그 친구보다 이 세상에서 얼마간 더 산다는 게 행운일까?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실버타운 안에서 보면 오래 사는 노년의 생활이 다양하다. 생활의 대부분을 골프로 보내는 노인들이 있다. 가만히 보면 시간을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기 위해 하는 것 같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 잘 모르겠다. 악기나 외국어를 배우러 다니는 분도 있다. 그런 것들에는 높은 진입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노인의 머리에 더 이상 악보나 단어들이 입력되기가 쉽지 않다. 힘에 부치는 것이다. 대부분 중간에서 의욕이 시들어 버리는 것 같다. 실버타운의 바깥세상에서도 빈 깡통같은 소리가 와글거린다. 


고교 동문들 중 일부는 카톡에 단톡방을 만들어 진영논리로 반대파 정치인을 공격한다. 거의 증오 수준의 글도 많다. 세상의 불행을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이나 계급에 전가한다. 더러는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불행의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악한 점만 보고 비난한다. 삶의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왜 그렇게 낭비하는지 안타깝다. 내가 평생 해온 변호사라는 직업은 악인에게서도 선한 면을 찾아야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다. 선한 면을 보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남의 악한면 만을 보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아무리 명분을 그럴 듯 하게 달더다로 남의 흠만을 찾고 지적하는 부정자들은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실버타운에서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노인이 내게 슬며시 이런 말을 했다.

“실버타운에 아흔네 살 노인이 있어요. 육이오전쟁 때 의장대 대장을 했대요. 키도 크고 건강하고 잘생긴 사람만이 할 수 있었던 거죠. 국회의원도 하고 잘 살아오신 것 같아요. 어떻게 건강하신지 그 연세에도 운동을 꾸준히 하시는 거예요. 가끔 여기 노인들을 데리고 직접 차를 몰아 강릉으로 가는데 시속 백이십키로가 보통이라는 거예요. 그러던 분이 무슨 수술을 받으셨다고 하더라요. 며칠전에 그 분이 저한테 로프를 준비해 놨다면서 웃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당장 알아챘죠. 죽기도 쉽지 않아요. 로프도 얇고 질긴걸 구해야 해요. 미끄러지는 것들은 매듭이 풀리기 쉽고 말이죠. 내가 로프를 걸만한 나무를 알고 있는데 그걸 알려줘야 할까 말까 잘 모르겠어.”

마지막으로 닥쳐올 병과 죽음에 대한 태도들인 것 같다.

노년의 남은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적인 자기완성의 길은 아닐까? 그런 길을 가는 노인들을 봤다. 나는 고려대 총장이던 김상협 교수의 평전을 썼다. 김상협 교수는 정년 퇴직을 하고 나이 칠십부터 조용히 숨을 거둘 때까지의 나머지 시간을 경전들을 공부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노년에 북한산 자락에 집을 짓고 성경을 보며 매일의 명상기록인 ‘다석일지’를 썼다. 방송국 사장을 지낸 대학 선배 한 분은 퇴직을 한 후 지리산에 들어가 십이년째 참선을 하면서 지리산 수필가가 되어 있다. 실버타운 안에서도 매일 불경을 필사하는 노인이 있다. 또 매일 성경을 공책에 또박또박 적는 분도 있다. 노년에는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현실의 세상보다 더 가까워진 영원쪽을 공부해 보는 것도 괞찮지 않을까? 노년에 내적인 자기완성의 길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