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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국화꽃 향기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16. 07:51





노란 국화꽃 향기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탈주범으로 유명했던 신창원을 변호했었다. 군 작전을 하듯이 수 천명의 경찰 병력이 동원되어 그를 추적했다. 체포된 후 쇠사슬에 온 몸이 묶인 채 독기 서린 눈을 부릅뜬 그를 봤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가 후회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였어요. 학교에 낼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혼자 복도에 나가서 벌을 서기도 하고 맞기도 했어요. 어떻게나 서러운지 학교를 아예 가지 않았죠.”

나는 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때 보았던 한 광경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자그마한 한 아이가 수업에 조금 늦게 들어왔다. 선생님은 짜증 난 얼굴로 그 아이를 엎드려 뻗치게 했다. 선생은 갑자기 경찰봉같은 몽둥이를 들고 엎드려 있는 그 아이의 허리띠를 잡고 들어올렸다. 아이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손에 등 몽둥이로 사정없이 아이를 잔인하게 두들겨 팼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려 벌벌 떨었었다. 뾰족한 턱에 하얀 표정이었던 선생의 얼굴과 아이의 절규가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 탈주범 신창원은 내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때 선생님이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만 해 줬더라도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를 잡으려고 수천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비상이 걸렸어요. 그 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는 비용보다 초등학교 선생이 나같은 아이에게 따뜻하게 해 줬더라면 예산 낭비가 없었을 거 아닙니까?”

세상에는 좋은 선생도 나쁜 선생도 있었다. 잔인한 폭력선생과는 달리 지금까지 내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선생님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 때였다. 교육대를 갓 졸업하고 부임한 이십대 초의 선생님은 꿈과 사명감이 가득한 것 같았다. 아이들을 하나하나 사랑으로 대하고 절대 때리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방과 후 청소를 끝낸 나에게 교실에 남으라고 했다. 선생님은 교단 위에 놓여있던 노란 국화꽃이 담긴 화병을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무심히 그걸 바라보고 있으라고 지시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국화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꽃은 꽃일 뿐이었다. 선생님이 왜 그런 엉뚱한 지시를 내리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나만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몸이 뒤틀렸다. 교실 창문으로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텅빈 운동장이 적막해 보였다.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드렁한 기분으로 꽃을 보던 나는 어느 순간 무채색의 공간에서 국화의 노란 색깔이 환하게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 싱그럽고 화사한 노랑이 가슴속까지 물들게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갑자기 상큼한 국화꽃 향기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국화꽃은 교실 구석에 정물같이 있던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 느꼈던 국화꽃의 노랑과 향기는 평생 나의 뇌리에 담겨있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교실 앞쪽 창가에 붙어있는 교사용 책상 옆으로 나를 오게 했다. 선생님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있던 대학노트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펼쳐놓았다. 하얀 페이지 마다 펜으로 쓴 예쁜 글씨들이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오글거리며 웃고 떠드는 것 같았다.

“이게 내가 쓴 시들이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시라는 걸 처음 알았다. 선생님은 교사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기도 하구나 하고 막연히 알았다.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동시를 쓰게 해 ‘강물’이라는 작은 어린이 문학지로 묶었다. 교과서와 전과를 달달 외워 중학입시 준비만이 전부인 줄 알던 내가 처음으로 문학적 감수성을 배웠다고 할까. 총각이었던 그 선생님은 휴일이면 나를 박물관이나 덕수궁 미술관도 데리고 다녔다. 점심때가 되면 기름 냄새가 구수하게 나오는 중국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처음 먹어보는 볶음밥도 사 주었다.

나만 편애하는 것 같은 선생님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부유한 집 아이도 아니었다. 공부도 운동도 노래도 잘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에 대해 학부형에게 하는 말을 좀 떨어진 자리에 들었다. 내가 지나가다가 텅 빈 복도에 있는 잘 못 버려진 의자를 보고 그걸 조용히 들어서 교실 제자리에 놓고 가는걸 봤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기억이 없던 일이었다. 아무튼 그 선생님 덕분에 내 어린 날의 감수성이 형성됐다.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도종환 시인과 만나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선생님인 그는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한테서 “좋은 물하고 나쁜 물하고 싸우면 어떤 게 이겨요?”라는 질문을 받고 얼떨떨 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가 “선생님 그것도 몰라요? 좋은물이 자꾸만 나와서 많아지면 이기죠”라고 미소지으면서 답을 말하더라고 했다. 그 꼬마아이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원망과 한이 있더라도 감사한 일들을 더 많이 떠올리면 내 속에서 행복이 어린시절 국화꽃 같이 향기를 뿜으며 환하게 피어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