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1950)
경북 의성군 봉양면 노매동 338에서 부친 노철준과 모친 오해월의 차남으로 출생. 가난한 농가였으나 유교적인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1908년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이 1909년 3월 9일 노매동에도 군영(교회)을 세웠는데, 소년시절부터 또래되는 아이들의 지도자격이었던 그는 7인동지를 구성하여 1915년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군영의 영학생(營學生)으로 성경통신공부, 군영의 소년사업에 솔선수범하였고 대구 영학생대회에도 도보로 출석할 만큼 열성이었다.
1916년 이노순과 결혼하였고, 1919년 부인과 함께 서울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 참위로 임관되어 경북 칠곡군영 담임으로 파송되었다. 이어서 31년간의 목회생활 중 경북에서 어천. 오리동. 낙평, 전북에서 도사리. 도장. 복홍리, 충남의 진주. 태안(회관신춘). 덕암 그리고 광주영. 전주영을 담임했다. 건장한 체격, 굳건한 의지, 강한 신앙, 쾌활한 생활로 가족과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한약으로 의료봉사도 했다. 1926년 구세군 분규와 2차대전 중의 구세단으로 개편되는 모진 역경과 일제의 핍박 속에도 굽히지 않고 진지(陣地)를 고수했다. 구세단이 구세군으로 환원 된 후 1949년 8월 17일에 그는 진주군영 담임으로 파송되어 큰 부흥을 일으켰으며 인근 마을에 기도처를 개척하였다.
1950년 6.25사변때 공산군은 경남 하동을 거쳐 진주로 육박, 30리 밖에서 격정 중인데도 [최종말이 오며는]이란 제목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였다. 월요일에 진주시가 함락되어 다른 교역자들은 부산으로 갔으나 끝까지 군영을 지키려고 5리 밖에 은신하였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취조받다가 9월 5일 새벽 3시경 16km밖의 지리산 기슭에서 총살되어 장엄하게 최후를 마쳤다.
취조 중, 보안서에서 부인과 딸을 시켜 그가 그들에게 혀보토록 권했으나 "나는 30년간 구세군에서 예수의 심자가밖에 전한 것이 없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대들에게 동조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를 앞세우고 진주영을 뒤질 때 구세군 모자를 강대상 속에 넣고 따라오는 부인과 딸 미리와 막내 아들 태식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라. 맏을을 지켜라.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고 유언을 남겼다. 죽기 전에 같이 죽는 학생들을 살려달라고 요구하고, 한손에 성경, 한손에 군기를 들고 "할렐루야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시오"라고 크게 외쳤다. 그는 세계 구세군 100년사의 처음 순교자였다. 장형일부령이 그의 후임으로 가서 회관증축 및 묘비건립 일주기추도회를 거교회적으로 가졌다.
이 사실은 만국본영(런던)에서 발행하는 <구세공보>(The War Cry), <사관잡지>, <벵가드>(The Vangard), <영학생교재>, <소년주일공과>, <전세계>(全世界)등의 간행물과 <<구세군 100년사>>, <<극동의 구세군>>등 책자로 널리 알려졌다. <<순교자의 피>>(1967)라는 영화를 만국본영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최후 광경을 목격한 두 청년(김복권. 최광수)은 지금 사관(士官)이 되었고, 고인의 2남 5녀중 막내아들(태식)과 장손(정일)이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막내사위인 이기춘은 감리교신학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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