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마중 - 문태준
내 시골마을 어머니들은
돌아오는 자식들을 마중 나갈 생각에 어젯밤 잠을 설쳤을 것이고
▲ 문태준 시인
시골 고향집에 다녀온 지 달포가량 지났다. 고향집이 자꾸 눈에 밟힌다. 대문 없는 집 어귀와 잡풀 스러진 뒤란과 두 그루의 앙상한 감나무, 찬 별 쏟아지는 밤하늘,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시골집이 마른 우물로 여겨지더니 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번에 내가 어둑한 때에 옆집을 바라본 경험 때문인 듯했다. 옆집은 자식들이 타지로 모두 떠나 어머니 홀로 살고 있었다. 집은 채굴막장처럼 캄캄하고 얼음처럼 차가워 보였다.
그날 나는 옆집 어머니가 집의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 맷돌질하는 소리가 났다. 바깥에 나갔다 돌아와 홀로 방으로 들어서며 불을 켜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옆집을 넘겨다본 이후로 시골집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그 증상은 남녘 땅에 눈보라가 불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는 날엔 더 심해졌다. 해가 일찍 떨어진 긴 밤 내내 텅 빈 마당에 불고 있을 눈보라와 누에고치처럼 누운 사람의 찬 머리맡이 생각났다.
이제 내 시골 마을에는 손님이 퍽 귀해졌다. 누구네 집에 손님이 들었다는 소문은 다음 날 아침이면 동네에 떠들썩하게 나돌았다. 오는 사람을 맞는 일이 그만큼 곱절로 귀해졌지만, 내 시골 마을은 언제나 따뜻한 마중이 있는 곳이었다. 어릴 때에도 그랬다. 밥상 둘레에 앉는 식구가 한둘 빈 저녁, 아버지는 "인제 올 때 되었다. 마중 나가 봐라"라고 가만히 말씀하셨다. 그러면 누나나 나는 마을 어귀까지 멀리 나가 식구를 기다렸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산길 밤길을 걸어오는 식구를 마중 나갔다.
어느 날은 내가 누나를 기다리고, 어느 날은 누나가 나를 마중 나왔다. "뭐 하러 나왔어? 괜히." 마중 나온 사람의 성의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야속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망태기처럼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담는 말이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마중을 나갔고, 흰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가운데 마중을 나갔고, 작은 어깨 너머로 별똥 떨어지는 것을 보며 마중을 나갔다.
설날을 목전에 두고 보니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마중 나가던 일이 제일로 먼저 떠오른다. 터미널이나 역으로 마중 나가는 일도 좋지만,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식구를 길 중간에 만나는 일도 각별하기 때문이다. 그 예전처럼 "안 춥나? 그러게 누가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라더나? 밥은?" 이렇게 물으면서 사람을 껴안듯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날을 맞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귀향 채비를 하면서 포도밭머리까지 늘 마중 나오던 어머니 생각을 했다. 반색하며 잘 익은 석류같이 얼굴이 화사하게 툭 터지던 어머니. 서정주 시인이 노래했듯이 "벼락 속에 들어앉아 꿈을 꿀 때에도/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이 되어주는 분이 우리의 어머니 아닌가. 내 시골 마을 어머니들은 돌아오는 자식들을 마중 나갈 생각에 어젯밤 틀림없이 잠을 설쳤을 것이고, 군불을 통 크게 넣어놓아 아랫목 윗목 없이 방바닥은 미리 후끈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흩어져 살던 식구들이 마중을 받으며 모두 돌아오면 시골집은 시끌시끌해질 것이다. 오글보글 찌개 끓듯 댓돌에는 벗어놓은 신발이 수북하고, 밤새 모과 빛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아 식구들은 못다한 속말을 풀어놓을 것이다. 주고받는 고단한 사연을 덮어주듯 흰 눈은 사각사각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면 혹한과도 같은 요즘의 살림살이를 잠시 잊기도 할 것이다.
마중은 챙겨주는 마음이요, 당신의 애씀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을 마중 나가는 일은 사랑을 알게 된 마음만이 시킬 줄 안다. 매서운 경제 불황 때문에라도 이번 설날에는 사람을 마중 나가는 일의 귀함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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