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장수 할머니의 이름찾기
남편이 갑자기 숨진 후 고향에 왔으나 가족 종적 못 찾아 어시장서 생선 팔다 몸져누워 기초생활수급 신청하려다 가족관계등록부 없는 것 알아 가족 이름도 기억 못했지만 변호사·법원 도움으로 해결 85세 김순옥(가명) 할머니는 생선장수였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60년 넘게 경남의 한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장맛비가 추적거려도, 뙤약볕이 내리쬐어도 변변한 가림막도 없이 좌판을 깔았다. 늙어서 허리는 굽었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새까매졌다.
몇 해 전 장사가 힘에 부쳐 좌판을 거두면서부터 시장통 옆 단칸 셋방에 몸져눕는 날이 많아졌다. 거동이 불편했고, 말이 어눌했으며 기억도 흐릿했다. 몸을 의탁할 자식도 없었다. 근근이 버틴 세월, 삶의 고단함은 점점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해보라"고 나섰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되면 매월 40여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이웃 이경순(가명)씨가 작년 12월 할머니를 부축하고 동사무소를 찾았다.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경순씨가 신청을 대신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려면 가족관계등록부가 있어야 되는데, 할머니 이름으로 된 가족관계등록부가 없었다.
가족관계등록부로 대체된 옛 호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1962년 주민등록제가 시행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받았는데도 가족관계를 입증할 서류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당시 공무원이 호적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주민등록을 해준 것 같다"는 말만 했다.
마음이 급해진 할머니와 경순씨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진주출장소 김성현 변호사를 찾았다.
가슴에 응어리진 삶의 굴곡을 할머니가 풀어놓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 말은 자주 끊겼다.
할머니는 1926년 경남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찢어지게 가난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열 살 무렵부터 집안일을 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계부와 함께 살았다.
형편이 어렵던 계부는 10대 후반에 그를 전라도에 사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남자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갑자기 숨졌다.
맘 붙이고 살 자식도 없던 그는 다시 고향으로 왔지만 가족들은 이사해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어시장에 좌판을 깔았다.
할머니의 기구한 인생사에 가슴이 먹먹해진 김 변호사는 할머니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신청을 법원에 내기로 했다.
하지만 곳곳에 걸림돌이 있었다. 노인성 치매 증세가 있는 할머니는 가족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남편과 시아버지, 시집갔던 전라도 시골 마을의 이름 정도만 기억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서류를 확인했더니, 할머니가 기억하는 시아버지 이름으로 된 제적등본(가족관계등록부에서 사망 등으로 삭제된 이들을 따로 모아놓은 것)이 남아 있었고, 남편 이름도 그 등본에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아내 이름이 김순옥이 아니라 김명순(가명)으로 돼 있었다.
할머니와 김명순의 생년월일도 조금 달랐다. 여러 정황상 할머니의 본래 이름이 김명순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할머니는 "시집갔다가 고향으로 와서는 김순옥이란 이름을 썼다"는 말만 반복했다.
할머니가 왜 그 이름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려서 집에서 부르던 이름일 수도 있었지만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김 변호사는 일단 '김순옥'이란 이름으로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신청을 냈다.
할머니에겐 기초생활수급자 생계지원을 받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다.
'김명순'으로 신청하면 일치하지 않는 인적사항 때문에 법원의 심리가 길어지고 자칫 신청이 기각될 우려도 있었다.
다만 김 변호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가 남편과 시아버지라고 말한 이들의 제적등본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법원(창원지법 진주지원)도 그 부분을 미심쩍어했다.
재판부는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해보자"면서 할머니의 증명사진을 있는 대로 모아 김명순의 제적에 가족으로 올라 있는 이들의 주소지로 보냈다.
가족들이 고령이라 재판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할머니가) 내 언니가 맞다"는 연락이 왔다. 3명의 할머니 동생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법원은 몇 달 전 할머니를 '김명순'으로 인정하고, '김순옥'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신청은 기각했다.
대신 관할 동사무소에 할머니 제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할머니의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도록 했다.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을 받게 됐고, 60년 넘게 잊고 지낸 진짜 이름과 동생도 찾았다.
김 변호사는 "여생이 길지 않을 할머니에게 작은 선물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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