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우리 사회가 딸을 더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속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딸만 셋을 키운 내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다. 어디 나뿐이랴, 딸만 둔 여인들은 나처럼 미소를 짓지 않을까 싶다.
결혼을 하고 첫 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님은 살림밑천이라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두세 살 터울로 둘째, 셋째가 태어났을 때도, 그 시절 인기가 많았던 가수 그룹을 운운하시며 ‘안 시스터즈를 만들면 되겠네.’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여 딸만 낳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지 살피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시누이든, 손위 동서든, 누구든지 한마디만 하면 바로 대항할 자세로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이 사람이 누가 뭐란다고 그래, 마음 편히 갖고 우리 딸들 잘 기르자 구.”
좌불안석인 나에게 남편이 해준 말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온다.
나의 시어머님은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셨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어머님 덕분에 마음고생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늘 인자하셨고 품성이 어진 분이었다. 맛나게 미역국을 끓여주셨던 일, 생명의 소중함을 일러주시며 언짢아하는 내 마음을 토닥여 주셨던 일, 세상 떠나신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생각하면 그리운 마음뿐이다.
우리나라 남아선호사상은 그 뿌리가 깊다. 고려시대 이후에 확립되기 시작하여 유교문화의 융성과 1700년 중엽 이후, 철저하게 계승되었고, 가계계승을 위한 전통가족제도가 원리였다. 장자는 결혼하여 부모와 함께 살면서 봉 제사(奉祭祀)를 받들고, 가족제도가 부계(父系)로 이어지면서 남아 선호사상은 더욱 굳혀졌다. 1970년 영화로 상영되었던 ‘이조여인잔혹사’는 작고한 신상옥 감독의 작품이다. 봉건적인 인습에 희생된 조선시대여인들의 이야기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악습으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이 받는 수모와 핍박은 처절할 만큼 잔혹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일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이 땅의 여인들은 아들을 원했다. 나 역시 남편을 닮은 아들 하나 얻기를 소원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막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사주(四柱)를 잘 본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아들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다. 허탈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딸도 잘 키우면 아들 노릇 합니다.’ 했다.
1980년대, 아들을 둔 사람은 그야말로 든든한 노후보험이라도 들어 놓은 것처럼 흐뭇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 밥은 편히 앉아서 받아먹고, 딸 밥은 서서 먹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어느 모임을 가든, 또 조금 안면(顔面)을 트고 나면 사람들은 물었다.
“ 몇 남매 두셨어요?”
“딸만 두었습니다.”라고 답하면 혀를 끌끌 차거나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보곤 했다.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남매를 두었어요.’ 하는 말로 대신해버린 적도 있었다. 그간에 딸들을 키우며 어쩔 수 없이 웃어넘긴 일은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잘했다는 상도 받아오고 칭찬도 듣고, 여느 집처럼 자식 키우는 재미에 나는 서운함을 잊어갔다. 사춘기가 지나고 딸들이 예쁜 숙녀로 자랐을 때, 우리 집은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병에 꽃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은 딸들의 남자친구가 주는 꽃이었다. 빨간 장미로 시작하여 핑크빛 튤립, 노란 후리지아, 하얀 안개꽃, 향기 나는 백합까지, 시들만 하면 번갈아 들고 들어 왔다. 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딸아이들도 곱게 피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아이들과는 마음이 잘 통했다. 친구도 이런 친구가 없다. 쇼핑도 함께하고, 여행도 함께 간다. 그것은 딸을 둔 엄마들만의 특별한 혜택이지 싶다.
요즘은 시집간 딸 곁에 사는 것이 편하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한다. 김치를 담아 택배로 보내고, 며느리에게 전화만 해야 하는 시대라고 친구들은 말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아들은 품 안의 사랑이고, 딸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세태를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시인 이향지씨는 ‘반달’을 작사 작곡한 윤극영 선생님의 며느리다. 생전에 며느리들로부터 아버님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아버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그 선생님도 당신의 아들과 딸처럼, 며느리를 쉰이 되도록 이름 ‘향지’로 불렀단다. 불필요한 격식을 걷어버림으로 더욱 가까워진다는 이 시인은, 그 아버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딸이 결혼하면 그 집 며느리요, 아들이 결혼하면 내 집 며느리다. 딸, 아들, 며느리, 차별 없이 이름을 부른 것은, 그 선생님만의 특별한 사랑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안이 환했던 딸들은 혼인을 했다. 가까이 살아 손자 손녀 안겨주고 오순도순 산다. 내목소리만 들어도 컨디션 지수(指數)를 짐작하는 둘째 딸, 시시때때로 어미생각을 해주는 딸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온 것이라 읊은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 모두 그 소풍 끝나면 떠나는 인생일 것인데,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떠하랴, 조물주가(造化 神) 나에게 점지해준 소중한 생명인 것을.
-한국수필 2010. 7월호 발표-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향 유감 (故鄕有感) - 최윤정 (0) | 2013.09.21 |
---|---|
서울깍쟁이 - 방계은 (0) | 2013.09.18 |
바다 - 한상렬 (0) | 2013.09.16 |
빗 - 조문자 (0) | 2013.09.14 |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 정약용 (0) | 201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