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다신교 우상숭배 문명권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출처: 약속과 축복의 전주곡. 윤상문 목사지음. 출판사: 기독신문사
아브라함의 고향은 인류 최고의 문명지인 메소포타미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세계사에서 제일 먼저
주목을 받는 문명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서 일어난
인류 최고의 문명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문명지인 이 메소포타미아가 성경역사의 기원이 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수메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곳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여 문명을 이룬 민족이 수메르인이고
그들이 사용한 문자가 설형(쐐기)문자이며 성경에서는
이 수메르가 시날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수메르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신전중심으로 행정계통이 수립되어 있었으나
셈족들이 몰려와 이 수메르 도시 국가들을 점령, 통일 제국을 전설한 것이
사르곤 1세의 아카드 제국이며, 그때가 약 B,C 2350~2371년경이었다.
여기서 신생 수메르 제국 우르 Ⅲ왕조가 발흥하고 북쪽으로는 아싷리아 제국,
남쪽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이 일어났다.
이 메소포타미아가 바로 지금의 이라크이며 성경의 중요한 발생지이다.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구체적인 성지는 바로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이다.
수메르의 대표적인 도시 국가 ‘우르’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었지만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은 시리아 북부 하란 근처에 위치한
샨르 우르파로 여겨졌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였다.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닌 도시 문명의 귀족
1929년 3월 17일자 미국 뉴욕 타임스의 머릿기사는 모든 기독교인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르의 발굴,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고대 근동의 누지 문서에 의하면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당시의 몰아닥친 경제 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 있던
미국인들에게 전해진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 주의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아브라함’이라는 제목의 의도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텐트를 치고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
묘사돼 있지만,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원래 그의 고향인 우르에서는
엄연히 대도시의 귀족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당대 발달한 도시 문명의
법과 도덕, 천지 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승을 지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발견을 한 울리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1912년에는 ‘아라비아의 로런스’와 함께 시리아의 중심도시 카르케미시를 발굴해서
신 히타이트시대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대영박물관과 펜실베니아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 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울리의 우를 발굴은 성경 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B.C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사실, 우르는 1922년 올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도시는 아니다.
이미 1850년대부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당시 ‘텔 엘-무카야르, 즉
역청의 언덕’ 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광야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대 유적지를 주목했다. 무너진 지구라트의 벽돌 사이마다 검은 색의
역청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의 부탁을 받은
주 이라크 영국 영사인 테일러는 1856년 텔 엘-무카야르의 지구라트를 조사하다가
B.C 6세기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확인했다.
이 기록에서 나보니두스는 자신이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수하고 중축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곳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여진 것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아시리아 궁전들의 발굴에 치중한 영국은 더 이상
우르를 발굴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비로소 1922년부터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서기 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
당시 우르 제Ⅲ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
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 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 넣기도 했다.
울리는 우르의 지하 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
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B.C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 구의 유골의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장식이 발견됐다.
소나 양의 머리모양을 하고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지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우르의 보물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토된 이집트 투탕카문의 보물과 함께 몇 해 동안 전 세계
신문의 해외 토픽 난을 장식했다.
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도 찾고자 했다.
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 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 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의 발견자라는 공로로 울리는 1935년 영국의 조지 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지만, 그의 해석은 아브라함의 고향에 관한논쟁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우르는 오늘날 터키의 하란 북쪽에 위치한
우르파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50년대까지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창세기의 기록이었다.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남쪽의 가나안으로 부친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남쪽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들렀다. 따라서 지리적인 경로로 보면
우르는 당연히 하란 근처에 위치한 도시여야만 한다.
하지만, 영국의 고고학자 테일러가 1850년대 이라크 남부 지역의 텔 엘-무키야르에서
‘우르’라는 지명이 밝혀진 기록을 발견했고, 1920년대 울 리가 그곳을 발굴해서
대대적인 성과를 얻은 후 성경학자들의 관심은 북쪽의 우르에서부터
1,500킬로미터 떨어진 남쪽의 우르로 쏠리게 된다.
따라서 하란 근처에서 우르를 찾으려는 학자들은 45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우르파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이후 시리아의 우가리트, 알랄라크. 에블라 등에서 출토된
토판 문서의 해독을 통해서 우르라는 도시가 여러 개 있으며,
모두가 하란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특이하게도 우르파의 이슬람교도들은 아브라함이 태어났다는 동굴과
아브라함의 기적과 관련된 연못을 성지로 보전해왔다.
비록 우르파를 발굴하지 못했지만 그 지리적 위치상 고대 근동의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우르슈로 볼수 있으며, 이미 B.C 300년경부터 우르파는
에뎃사로 불렸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중심적인 기독교 도시로 발전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늙은 종을 보냈다.
당연히 갈대아 우르로 가야 했지만, 늙은 종은 아람 ‘나하라임’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나홀의 성’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다.
아람 ‘나하라임’은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그리스어 칠십인역에 근거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잘못 번역되어 있으며, 다른 구절에서는 리브가의 고향을
밧닷아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두 아내와 두 여종을 통해서 모두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많은 구약학자들은 아카드어로 ‘파다누’가 ‘길’을 의미하기 때문에 밧단아람은
하란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하란은 원래 아카드어로는 ‘길’이라는 뜻이며,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은
상업과 대상들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1959년에 실시된 지표 조사와 간단한 발굴을 통해서 이곳은 B.C 2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0년대 이후 터키의 고고학자들이 소규모로 발굴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이 도시의 역사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란은 아카드어로 ‘신’이라 불리는 ‘달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B.C 1200년경 아람 민족이 하란에서 정착하기 시작했고,
창세기에 나타난 하란 지역의 다른 표현으로 알려진 ‘나하라임’이나 ‘밧단’이라는
지명에 ‘아람’ 이라는 민족의 이름이 첨가되었다.
하란은 B.C 612년, 잠시나마 몰락하는 아시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 정치적 중심지로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이라크 북동부의 고대 유적지 누지에서는 1925년부터 8년간의 발굴로 모두
3,500점에 달하는 토판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을 보면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아들이 없는 부부가 특정인을 양자로 삼는 것-엘리에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부인이 여종을 통해 대신 아들을 얻을 수 있고-
아스마엘, 나중에 본 부인에게 아들이 생기면 장자권을 획득하는 것-
이삭, 부인을 여동생으로 속이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 부인을 여동생으로 속이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 여자의 경우 오빠가 중매를 서면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며-
리브가, 아버지가 나설 경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결혼하는 것-
라헬과 레아, 아내를 얻기 위해 데릴사위로 봉사하는 것-
야곱, 임종시 상속에 관한 유언-
이삭과 야곱, 가족 상속권의 상징인 드라빔의 탈취-
라헬 등의 관습이 그러하다.
누지의 주인공은 후리 민족이며 이들은 하란 지역에까지 퍼져 살았다.
대부분 B.C 14세기에 기록된 이 문서를 근거로 한때 족장들의 전성기를
후기 청동기 시대로 낮추어 파악하려는 경향도 있었지만,
후대의 발굴을 통해 창세기 족장들의 사회적 관습은 특정한 시대에 관계없이
고대 근동지방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들임을 밝혀냈다.
시리아 북부 지역에 위치한 하란에서 우르를 찾으려는 시도에 있어 결정적인
장애물은 바로 ‘갈대아 우르라는 구절이다.
갈대아 민족은 바빌로니아 사람들로서 B.C 900년경부터 독자적인 민족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B.C 900년경부터 독자적인 민족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B.C 612년 이후 아시리아를 점령하고 새로운 제국 바빌로니아를
건설했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 는 바빌로니아의 한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창세기의 여러 구절에서는 분명히 족장들의 고향이 밧단아람,
즉 하란 지역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이 생겨났을까?
모세가 창세기을 기록할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세력은 바빌로니아,
곧 갈대아 민족이었으며 이 지역에는 우르라 불리는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