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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나무 - 송준용

Joyfule 2012. 11. 30. 11:28

 

 

모과 나무 - 송준용

 

 

언제부턴가 나는 우리집 정원에 서 있는 모과나무와 친해져 버렸다. 내가 모과나무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연유에서가 아니다. 나무로서의 자태 때문이다. 나무로서의 성품 때문이다. 나무에게 인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모과나무는 언제나 변함없이 믿음직스러워서 좋다.

 

우리는 흔히 처세할 줄 모르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을 보면 모과에 비유한다. 모과처럼 빡빡해서 도무지 변통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과면 어떠랴. 모과나무와 같은 사람이면 어떠랴. 인간은 때로 모과처럼 모과나무처럼 살아볼 필요가 있는 것을.

 

지난해에는 얼추 한 접이나 되는 모과를 딸 수 있었다. 모과 중에는 때깔이 곱고 깨끗한 것이 있는가 하면 울퉁불퉁해서 과일로서의 품위를 잃고 있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운 바람과 찬비를 견디어낸 인고(忍苦)의 결실이 아닌가.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무가 주는 선물이기에 더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시장에 내다판다고 했지만 나는 반대했다.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이웃에 나누어주고 남은 모과를 잘게 쪼개서 말린 다음 적당한 양(量)의 소주를 부어 놓았더니 훌륭한 모과주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과주 한 잔씩을 권하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누가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했던가. 모르는 소리다. 모르는 사람들의 힐난이다. 모과를 보고 있으면 상강(霜降) 지난 고향의 가을이 생각나고, 등이 굽도록 한세상을 물레만 잣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인종(忍從)이 생각난다.

 

이땅의 여인들 치고 그 누군들 인생을 순탄하게만 살아왔을까 마는 우리 할머니는 유독 그 경우가 달랐다. 백발이 성성하도록 물레잣기에만 열중하셨던 만년의 할머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던가. 석 섬지기 무논에서 건져 올린 볏가리도 빼앗기고 유일한 당신의 혈육인 아버지마저 징용에 끌려가선 소식이 없자 밤마다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아졌다.

“저눔의, 저눔의 시상이 웬수로다!”
“할머니, 이제 고만 자요.”
“오냐, 오오냐, 이 불쌍한 것. 쯧쯧쯔….”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난 다음 날이면 왜 그랬을까? 장독에도 마당에도 할머니의 한처럼 성긴 서릿발이 하얗게 깔려 있었고 잎진 나뭇가지엔 모과만이 덩그랗게 익어 있었다.

아버지가 집을 비워버리자 우리집의 가세(家勢)는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 어머니께서 그처럼 기를 쓰고 길쌈을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할머니의 물레에 감겨지던 기다림의 세월을 그 누가 알 것인가. 가슴에 못을 박고 죽은 할머니의 그 지나간 일생을….

 

그렇다. 모과는 고향의 과일이다. 헌신의 과일이다. 기다림에 지친 인종의 과일이다.
이웃들에게까지 푸짐한 모과를 선사한 모과나무는 늦가을이 되자 하나 둘 나뭇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 나무가 위치한 곳이 정원 한중간이고 보니 뒹구는 낙엽 때문에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다. 쓸어도 떨어지고 쓸어도 떨어지곤 해서 뜨락은 잠시도 어지러져 있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것을 본 큰녀석이 말했다.

“어머니, 저 나뭇잎을 몽땅 떨어 버려요.”

그러자 아내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 그럴까?”

 

찬성도 반대도 아닌 웃음이었다. 그러나 낙엽은 스스로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떨어지는 법. 그것을 일부러 일시에 떨어지게 할 수야 없지 않는가.

“그게 무슨 소리냐. 비록 귀찮더라고 그건 안될 말이야.”

“그럼 당신이 아침마다 청소하세요. 난 지쳤어요.”

“알았어요. 내가 할테니 염려말아요.”


다음날부터 나는 정원이며 뜨락에 뒹구는 낙엽을 쓰는 일로 바빠졌다. 결국 그 말의 책임을 지고 만 것이다.

보통 때는 덜했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집안은 숫제 낙엽천지였다. 그러나 낙엽을 쓰는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것과는 달랐다. 하루의 일과는 어김없이 빗자루 드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으로 해낼 수가 있었으니 나는 그 일에 흠뻑 빠져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때 내가 잡은 빗자루 끝에 쓸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지나간 날의 회억과 잊을 수 없었던 한의 편린(片鱗)들이 아니었을까? 한아름 낙엽을 보듬아 안을 때마다 가슴은 벅찬 감회로 뻐근해 왔다.

 

모과잎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자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유리알 같은 하늘이 자꾸만 멀어져 갔다. 간간이 이름 모를 새들만 날아와 우짖고 갈 뿐이었다.

나는 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좋았다. 가릴 것 없는 나무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때때로 나는 그 나무 아래 서기를 좋아한다. 이제는 모과도 없도 잎사귀도 없지만, 옹이진 껍질을 통해서 지나간 날의 상처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가꾸지 않고 돌보지 않아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풍성한 실과로 보답하는 나무, 누가 아랴. 그 열매들을 매달기 위해 밤마다 산고(産苦)의 아픔을 견뎠을 줄을….

이것은 절대로 내 허튼 상상력의 비약이 아니다. 모과나무는 충분히 그럴만한 내력이 있어 보인다.

 

“당신은 모과 같은 사람이예요.”

만일 아내가 이런 말로 비꼬아온다 해도 나는 결코 화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허허헛!” 웃어줄 것이다. 앞뒤가 막혀서 도무지 시원하게 뚫린 데라곤 없지만 모과처럼 살아가면 될 것이기에…. 모과나무처럼 꺾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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