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최대봉의 낭만수첩 [99]고향

Joyfule 2012. 12. 3. 10:19

 

 최대봉의 낭만수첩 [99]고향

 

 

[391호] 2012년 09월 28일 (금) 12:23:51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아주 오래 전, 동해로 가는 영동선 열차 안이었다. 담배 연기 자욱한 열차 안에서 마른 오징어나 세모난 비닐봉지에 든 낙화생(落花生, 노란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힌다 하여 땅콩을 그렇게 우아하게 부르던 때가 있었다)과 함께 소주를 팔던 담대한 낭만의 시절이었다.

 

남루한 행색을 한 중년의 사내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따금 힐끗힐끗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맞은편에 앉은 내게 소주가 가득 담겨 찰랑이는 종이컵을 내밀기도 했다.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간 ‘아리랑’ 담배를 낀 투박한 손가락 끝이 노랬다. 취기가 오른 탓인지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도회에 가서 살았던 굽이굽이 인생사를 늘어놓나 했더니 차창 밖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바다를 보며 갑자기 쿨쩍쿨쩍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내는 말했다.

“삼십 년 만에 고향 바다를 보니 슬픔이 납니다.” ‘눈물이 난다’도 아니고 ‘슬픔이 난다’라는 비문(非文)과 함께 ‘고향’이라는 말은 그때 내게 생경한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추석이나 설이면 고향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의 물결을 보노라면 행인지 불행인지 젊은 시절의 몇 해를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나는 오래 전 열차에서 만났던 그 사내를 떠올리며 고향이라는 말의 찡한 느낌을 짐작해볼 뿐이다.

 

그대 다시 고향에 못 가리(You Can’t Go Home Again)’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 더불어 1920년대 후반 미국의 대공황기의 서민들의 강퍅한 삶과 그로 인한 인간성의 파괴를 고발한 토머스 울프의 소설이다.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은 평화롭던 고향이 무분별한 개발과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며 기억의 도피처마저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분노한다. 내 친구 김승기 시인의 고향은 밀물 때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정겨운 곳이었다고 한다.

중국과의 수교로 인한 개발 붐으로 어릴 때 조개도 줍고 미역도 건지며 뛰어놀던 마을 앞 바다는 매립되고 하루에도 몇 개씩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쓸쓸함이 번진다. 그에게 고향은 어머니가 뜨신 밥에 갓 잡아온 곤쟁이를 얹어 쓱쓱 비벼주시던 희미한 맛으로만 남아 있다.

 

그의 기억 속에 그리움으로 남은 곤쟁이 밥이라는 것은 고등학교 때 겨우 첨으로 바다 구경을 해본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맛이지만 그의 고향을 잃은 자로서의 비애만큼은 어렴풋 짐작이 된다. 따뜻한 기억이 있던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 모두가 다 실향(失鄕)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훈련소에서 조교들이 훈련병을 울리기란 손바닥 뒤집듯 쉬웠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 뺑뺑이를 돌리고 난 다음에 ‘고향의 봄’을 부르게만 하면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까지는 잘 나가다가 ‘복숭아꽃 살구꽃’ 쯤에서부터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에서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실향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의 노래에서는 고향이라는 말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난 시절 우리의 유행가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말이 고향일 것이다.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간도로 떠돌면서, 이고 지고 피난길에 오르면서.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도시로 떠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가슴에 품고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절절한 그리움이 노래로 남았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의 고복수의 ‘타향살이’부터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의 오기택의 ‘고향 무정’, 나훈아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 역’에 이르기까지 고향은 마치 어머니처럼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실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도 정지용의 ‘향수(鄕愁)’임은 말할 것도 없고 팝송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톰 존스의 ‘고향의 푸른 잔디(Green,Green Grass of Home)’와 존 덴버의 ‘고향으로 데려가 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가 부동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고향은 떠도는 자의 정체성(正體性)이기도 했다. 그 이름 앞에(또는 뒤에) 고향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그랬고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그랬고 잔다르크(Jeanne d’Ark에서 아르크는 지명이다)가 그랬다. 한국인들의 피 속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진한 향수의 DNA가 녹아 있다. 우리의 이력서나 증명서에는 대다수의 다른 나라들에는 없는 고향이 본적(本籍)이라는 항목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호마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서고 월나라 새는 남쪽으로 난 가지를 가려서 앉는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라는 고시(古詩)에서도 이르듯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것이 우리의 정서이고 고향은 언젠가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곳이다.

 

추석이 가까워오면서 거리마다, 동네 들머리마다 고향에 오심을 환영한다는 현수막들이 걸리고 있다. 고향을 찾으시는 분들은 부디 차례를 지내기가 바쁘게 떠날 채비하지 마시고 이틀쯤 더 고향집에 머무시라.

어머니와 함께 누워 옛날 얘기도 도란도란 나눠보시고 어릴 적 뛰놀던 동산에도 오르시고 변함없이 뒤뜰을 지키고 서 있는 감나무에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시고 아이 손잡고 옛날 다니던 학교에도 가보시고 메뚜기 잡으러 논길로도 들어서보시라. 시멘트 집에서 태어나 시멘트를 밟고 사는 아이에게도 언제나 그리운 고향 하나 정도는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빌어본다. 비둘기호 영동선 완행열차 차창에 기대 울던 그 사내에게 고향이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했기를.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타리 - 주영준   (0) 2012.12.06
사람 사는 맛~ 서툰 주례 - 목필균   (0) 2012.12.05
돈 - 윤모촌  (0) 2012.12.01
모과 나무 - 송준용   (0) 2012.11.30
초록 보리밭 - 유혜자   (0) 20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