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목성균 수필 연재 - 바래너미의 고욤나무

Joyfule 2012. 3. 2. 10:56

 

    

 

목성균 수필 연재 - 바래너미의 고욤나무

 

아래 글은 이승훈 님이 2004년 7월 4일 목성균 선생님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앞의 선생님께서 처음 쓰신 글과 퇴고작을 함께 싣습니다. (향)

 

 

작년 말이었습니다. 문학저널 신년호에 선생님 작품을 싣고 싶어서 조심스럽게 청탁을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신년 분위기와 맞는 "눈물에 젖은 연하장" 을 싣겠다고 했으나
이미 다른 문예지에 싣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바래너미의 고욤나무"로 결정을 했었지요.
선생님께 허락을 받은 후 작품을 이곳에서 복사를 하고 원고들을 정리 중이었습니다

원고 정리가 막바지에 이르고 편집에 들어가던 중 선생님이 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간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퇴고를 하였으니
편집이 끝나지 않았으면 퇴고한 작품으로 실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퇴고 내용은 차지하고 우선 선생님의 정성과 겸손함에 숙연했습니다
선생님의 옥고를 실으면서 무엇보다 원고료를 지급해드리지 못함이 죄송한데
제자 같은 사람에게 작품을 보내면서도 배려하신 세심함이라니...

다듬어진 작품 내용을 이전 작품과 비교하며 읽어보았습니다
더욱 절제되고 정제된 문장, 첨삭된 표현 그리고 조사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퇴고를 하셨습디다.
평소 때는 물론이고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때
작가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선생님의 장인정신이라고나 할까요
수필문학의 최정점을 자리하고 계신 분의 자세가 이러한데 나는 어떠한가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전 이제 갓 등단한 사람들에게나 주변 지인들에게
문학 앞에서는 아무리 겸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늘 말해옵니다
살아 생전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문학강의를 듣거나
그 외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 없으나 이렇듯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선생님의 49재가 가까워 오네요
계산을 해보니 평일이 될 거 같아 주말을 통해 미리 목련공원을 다녀올 생각입니다

바래너미의 고욤나무 퇴고작품 올립니다
시간 되신 분들은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원작과 비교해서 감상해 보시면 수필 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향록 선생님
목성균 선생님 작품을 시디로 저장한다니 고생이 많습니다
선생님의 홈페이지에 실린 작품들 중에는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이 있을 것이고
선생님의 성격상 홈페이지에 있는 작품 그대로 발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발표된 작품은 퇴고를 하셨을 터이니 그 퇴고된 작품을 찾아 저장하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한마디 더, 뒤늦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향록선생님, 연님, 물빛님 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날에 문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바래너미의 고욤나무(퇴고작)

동네 앞산줄기가 말 잔등이처럼 축 처진 자리를 바래너미라고 한다.
올라가 보면 평평한 억새밭인데, 그 중간쯤 늙은 고욤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고욤나무 아래는 펑퍼짐한 너럭바위가 엎드려 있고 그 옆에 가랑잎이 가득 가라앉은 옹달샘이 있다. 사람들은 그 자리가 집터였다고 하는데 집이 있던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집터가 아니랄 수도 없다. 한 때 이 산정에서도 산바람 같이 초연한 삶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고욤나무가 증명해주는 듯했다.

첫눈이 올 때면 가끔 그 늙은 고욤나무가 생각난다.
윗버들미 사람들은 갈 일이 끝나면 다람쥐 도토리 물어 나르듯 부지런히 나무를 해 날랐다. 섣달그믐까지 집 안에 나무 짐이 가득 쌓여야 정월 한 달 맘놓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장정들은 바래너미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나무를 해 지고 예닐곱 번은 쉬어야 돌아올 수 있는 먼 나무길이지만 거기 가야 관솔 배긴 소나무 삭정이나, 마른 싸리나무 같은 불 때기 편하고 화력 좋은 나무를 해 올 수 있었다.

그 나무는 동매 떠서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삽짝 안에 자랑하듯 배겨놓았다. 그걸 동네사람들은 정월 나무라고 했다. 그 나무로 섣달그믐께 가래떡살도 찌고, 조청도 고고, 두부도 하고, 적도 부쳤다. 정월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적의(適宜)의 화력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화력은 분주한 정월달 부엌간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삼동의 추운 부엌간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높은 화력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여인네들의 복이다. 그 복을 남정네들이 바래너미에서 가져다주었다. 정월나무라는 말은 그런 의가 아닌가 싶다.
바래너미 나무를 때는 집은 굴뚝을 보면 안다. 파란 연기가 조용히 오르면 바래너미 나무를 때는 것이고, 굴뚝에서 짚 동 같이 검은 연기가 오르면 청솔 가지나 물거리(생나무)를 때는 것인데, 굴뚝의 연기가 그 지경으로 나와 가지고는 내외간에 금실 좋기는 꿩 새 운 집이다. 왜냐하면 굴뚝에 그 지경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려면 아내가 아궁이에 얼굴을 들여대고 ‘빌어먹을 놈의 화상-. 빌어먹을 놈의 화상-.’ 하고 서방 욕을 하며 모깃불 피울 때처럼 눈물 콧물 좀 흘리며 불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월나무가 삽짝 안에 그득하면, 집이야 비록 오두막일망정 벼 백이나 하는 고대광실(高臺廣室) 못지 않게 복돼 보였다.

우리는 정월 나무를 삽짝 안에 싸놓고 정월을 나본 적이 없다. 내 할머니와 어머니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정월을 지낸 셈이다. 아버지는 읍내 출입이나 하시며 사셨고 농사는 할머니가 머슴을 데리고 지으셨는데 머슴은 한해 농사가 끝나면 새경을 받아 가지고 저의 집으로 돌아가고 새 머슴은 정월을 넘어서 들어왔다. 우리는 정월나무를 싸놓고 때기는커녕 늘 나무에 쪼들리며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해 겨울,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원을 풀어드리기로 작심하고 바래너미로 나무를 하러갔다. 아무도 그리 멀리 나무를 하러 안 가는 눈이 올 듯 착 찌부러진 날이었다. 그런 날은 장정들도 나무를 하러 멀리 가지 않고 사랑방 군불 나무나 가까운 산에 가서 해왔다. 나무하는 일이 몸에 배지도 않은 처지에 눈이 올 듯한 날 혼자 그리 멀리 나무를 하러 가는 건 모험이랄 수 있다.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농사는 아무나 짖는 줄 아느냐’며 햇농군을 품앗이에도 안 끼워주는 장정들의 폐를 끼치기 싫은 오기도 있었지만, 필경은 까치둥지 같은 나무 짐을 지고 칠전팔기를 거듭하며 용렬스럽게 돌아올 나의 나무 길을 그들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종의 교만이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바래너미에 올라가 보았지만,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펑퍼짐한 산등성이의 마른 억새밭이 전혀 적적하지 않았다. 억새 밭 가운데 고욤을 잔뜩 열고 서있는 늙은 고욤나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고욤나무는 바람 센 산등성이의 힘든 여건 때문인지 헌출 하지는 못해도 많은 가지에 고욤을 잔뜩 열고 있었다. 흡사 삶이 고단하다고 불만할 줄도 모르고, 부자 되려고 아등바등 욕심부릴 줄도 모르고, 그저 그 날이 그 날같이 부지런할 줄 밖에 모르는, 애들 많은 우리 동네 이 서방, 박 서방 중 한 사람 같아 보였다.

지게를 고욤나무 아래 벗어 놓고 너럭바위에 앉아서 고욤나무에 등을 기댔다. 고욤이 융성하게 열린 가지 끝으로 산등성이가 흐린 하늘 아래 주절주절 펼쳐져 있었다.
소백산맥은 이마 위에 떠있고, 그의 지맥인 높고 낮은 산등성이들은 눈높이거나 눈 아래 놓여 있었다. 내가 앉은 바래너미 산등성이는 낮아지면서 남쪽으로 뻗어갔는데 끝은 안보이고 그 앞쪽을 가로막고 소백산맥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래너미 산등성이에서 가지를 친 작은 산등성이들이 버들미 골짜기를 향해 서쪽으로 뻗어 내리다 도랑 앞에서 멈춰 섰다.

모든 산줄기는 물길을 가로막지 않고, 물길은 산줄기를 피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처녑 같은 골짜기에 초가집과 다랑논과 뙈기밭들과 무덤들이 다소곳이 안겨서 소르르 겨울잠에 들어있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고만고만한 구획의 작은 경작지들이 차지한 다툼 없음이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순리와 잘 어울렸다. ‘나도 저 모습같이 살리라’. 울컥 감정이 복받쳤다.
숲에 들어가서 까치둥지만 하게 삭정이 나무를 해지고 고욤나무 아래까지 오는데도 나무 짐을 서너 번은 메어쳤다. 나무 짐이 쿨렁쿨렁하게 골아서 지게꼬리를 다시 졸라맸다. 나무 짐은 장정 나무 짐의 반도 안 되었다.

고욤나무 아래 나무 짐을 받쳐놓고 너럭바위에 앉았다. 이미 해는 척 기울고 나는 손끝 까닥할 힘도 없이 탈진한 상태였다. 산아래 우리 집이 조그마하게 바라보였다. 나무 짐을 저 집 삽짝 안에까지 져다 백여 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너럭바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욤들이 조롱조롱한 눈망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서 나를 먹고 힘내’ 그러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고욤나무로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고욤을 따먹었다.
나는 별미를 들라면 겨울 고욤나무에 반쯤 마른 채 달려있는 고욤 맛을 들겠다. 이미 수분은 다 증발하고 과당(果糖)만 남아있는 작은 까만 열매-. 그 열매는 흡사 건포도 같은데 질은 전혀 다르다. 건포도는 순전히 과육이지만 고욤은 약간의 과육에 둘러싸인 먹 잘 것 없는 자디잔 씨다. 건포도 맛과 겨울 고욤나무에 달린 고욤 맛은 같은 과당의 맛이긴 하지만 사탕과 엿 같은 것으로 근본이 다른 맛의 정서 차이가 존재한다.

원래 고욤은 털어서 단지에 담아두었다가 눈이 깊이 쌓인 겨울밤에 사발로 떠다가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이다. 자디잔 열매에서 껍질과 씨를 빼면 과육은 얼마 안 된다. 단지 안에서 죽같이 엉긴 고욤을 펑펑 눈 쌓이는 밤에 퍼다 먹는 것은 사실 과육에 버무린 견고한 고욤씨를 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맛을 아는 한국 사람이 이제 얼마나 될까. 긴긴 겨울밤 배고픔을 참으며 듣던 할머니 옛이야기 새참으로 먹던 그 가난한 과당을 섭취하기 위해서 우리의 배설기관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른 봄 거름을 낸 보리밭 골을 보면 인분(人糞)이라고 친 것이 올올한 고욤씨 뿐이었다.

그 고욤맛을 아는 한국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맛 ‘대통령도 몰라, 국회의원도 몰라’ 나는 어떤 한국적 맛의 기능자인 것처럼 자부심을 느낀다.
얼마쯤 과당을 섭취하고 나자 멀고 작게 바라보이던 우리 집이, 마치 명사수가 보는 과녁같이 크게 보였다.
나무에서 나려와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내 눈앞에 때아닌 흰나비가 날아들었다. 소담한 흰 눈송이가 산등성이 가득히 날랐다. 마침내 하늘 가득히 날랐다. 고욤나무는 눈발에 가뭇하게 묻히면서 내가 떠나는데도 홀로 침착하게 서있었다.

사십 오 년 전이다. 첫눈이 올 것 같은 예감에 고개를 들면 하늘이 착 가라앉은 산등성이의 늙은 고욤나무가 어제인 듯 선연하게 보인다. 우리 동네 정월나무꾼의 허기를 면하게 해준, 당도 높은 고욤을 가득 달고 침착하게 첫눈 속에 묻히던 고욤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까치둥지 만한 나무 한 짐이 삽짝 안에 배겨져 있는 걸 가지고 우리 손자가 해온 정월나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시던 할머니가 보인다. 그 고욤처럼 소박하기 짝이 없는 시대의 고욤맛 같은 행복이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