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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아버지의 도장

Joyfule 2012. 2. 28. 10:40

 

    

 

목성균 수필 연재 - 아버지의 도장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며칠 후, 어머니께서 손때에 절은 아버지의 도장을 내게 건네 주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다 불태우시며 어찌해서 도장은 남기셨을까. 도장이 아버지 같아서 차마 불길 속에 못 던지시고 내게 건네주신 것일까. 아버지의 생애와 더불어 용도폐기 된 도장을 어떻게 하라고 주시는 것인지, 나는 어리둥절해서 받아들었다.

아버지의 도장은 옥이나 수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도장도 아니었다. 귀하지도 천하지도 아니한 그나마 알아야 한다는 시골 면장 만한, 갈색 물소 뿔 도장이었다. 크기도 막도장보다는 조금 컸다. 동그라미 안에 아버지의 함자 목영기(睦榮基)에 인(印)자를 합한 네 자를 사방(四方) 틀로 조합해서 새겨 넣은 동그란 도장이었다.
테두리의 동그라미 선은 이가 빠지고, 글자의 가장자리도 달아서 가운데만 불룩했다. 소백산맥 속에 있는 작은 사회에서 작고 필수적이었던 약정(約定)들을 체결하며 살다 가신 아버지의 한평생이나 마찬가지인 도장을 보니 새삼 눈물겨워지는 것이었다.

도장의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였다. 한 획 한 획 공들여 쓰고 새긴 글씨였다. 이제 옛날 분이 되었지만 연풍 장터거리에 도장장이 안주사(安主事)라고 불려지는 아버지와 절친한 분이 계셨다. 이 도장의 글씨는 그 분의 필체가 분명하다.
그 분은 도장도 새기고 출생신고 같은 대서(代書)도 해주었는데 도장 값은 받고 대서료는 대포 한 잔으로 대신 했다. 그 분은 술을 좋아해서 당시 이미 알콜 중독 증세가 있으신 듯 딸기코에다 주기가 떨어지면 손을 떨었다.
사람들이 “안주사 출생신고서 좀 써주게-.” 하면 안주사는 “손이 떨려 못 써-.” 그러셨다. 사람들은 그 말을 얼른 알아듣고 대포 한 잔 하자고 끌었다. 그러면 안주사는 “아들이야 딸이야?” 하고 물었다. 왜냐하면 아들이면 면사무소 앞에 있는 박과부네 주막에 가서 앉아서 한 잔하고, 딸이면 차부 앞에 있는 양조장에 가서 서서 한잔을 하는 그 분이 정한 대서료 관행 때문이었다.

안주사는 붓으로 대서를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어른은 한잔 술에 필력(筆力)이 생기면 후세에 남길 붓글씨라도 쓰는 것처럼 출생신고서 용지 난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정성을 다해 적어 넣었다고 한다. 손아귀에 쥐가 나도록 붓을 공글러 잡고 글씨를 써서 보다못한 면서기가 “그리 공들여서 안 써도 출생신고 되는 거여-.” 했더니 안주사 말이 “생전에 처음 쓰는 애 이름을 어찌 함부로 써-.” 하더라는 것이다. 그 어른의 글씨는 연풍의 고택인 풍산홍가(豊山洪家) 생원 댁 바깥사랑 문설주 위에 당호 편액으로도 남아있다.

자유당 말기에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 초대 민선면장에 당선 되셨다. 그 날 밤이 이슥한데 만취가 되신 당고모부가 마치 승전보를 가지고 마라톤 광야에서 달려온 밀티아데스 휘하의 병사처럼 잠자리에 든 식구들을 깨워놓고 “작은 어머니 기뻐하십시오. 영기가 면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소릴 지르고 윗목에 쓰러져 이내 코를 고셨다고 한다.
이 어른은 취하면 아무데나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당고모는 겨울날 저물 녘이면 우리 집에 나려오셔서 아버지한테 울먹이며 보채셨다. “동생. 동구 밖에 좀 나가보게. 매형이 이 추위에 어느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베고 누었나봐, 놔두면 얼어죽을 꺼여-.” 아버지는 “얼어죽게 놔 둬요.” 볼멘소리를 지르시고는 이내 찾아 나서 곤 하셨다. 아버지와 당고모부는 동갑내기 죽마고우 사이다. 도장을 보니 아버지의 면장 당선을 애들처럼 기뻐하시던 당고모부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물소 뿔 도장만 해도 귀한 도장이었음에 틀림없다. 갠지스강유역 어디서 이 전후의 산읍 도장 포까지 흘러 들어온 물소 뿔 아닌가. 그 귀물에 아버지의 함자를 혼신의 힘으로 섭새김 해서 헌정(獻呈)하셨을 안주사의 아버지에 대한 우정을 그려본다.
그 분은 도장을 새기기에 앞서 박 과부 집에 가서 손이 떨리지 안도록 한잔 술을 했을 터인데 막걸리를 하지는 않았을 성싶다. 우정의 기념비적 도장을 새기는 마당에 막걸리를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 끝내는 술인가 베, 목로에 혼자 앉아서 왠 정종이여-.” 박 과부의 수상쩍어하는 농담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그 분이 호사(好事)로 여기는 따뜻하게 데운 정종을 한잔했을 것 같다. 그리고 도장포로 돌아와서 손수 램프의 등피를 깨끗이 닦아서 심지를 돋아놓고, 밤을 넘어 하얗게 새는 날까지 아버지의 이름 석자와 도장인자 합이 넉자를 정성을 다해 쓰고 새겼으리라.

마모가 심해도 아버지의 이름자는 자획(字劃)과 결구(結句)의 방정한 흔적으로 보아서 도장을 새기며 스스로 정신의 이완을 용서하지 않은 그 분의 마음이 느껴진다. 깊은 밤 바른 자세로 앉아서 붓끝에 우정을 모아 한 획 한 획 공글러 쓰고 새긴 글씨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도 아버지의 도장 글씨 만치 나를 감동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안주사는 이 도장을 아버지께 건네주면서 뭐라고 말씀 하셨을까? 그 분은 성격으로 보아서 도장을 건네며 “잘 써” 그리 한 마디 했을 것 같다. 그 말은 물론 도장 잃어버리지 말고 잘 쓰라는 말은 아니고 정도(正道) 것 쓰라는 충정(衷情) 말일 것이다. 아버지는 도장을 찍을 적마다 친구의 그 말을 명심했을 것이다.

도장의 닳은 정도로 보아 아버지는 어떤 의사들을 분명히 밝히며 사신 것이 틀림없다. 산읍의 면장, 농협조합장, 노인회장의 소임을 다하셨음은 물론, 신랑신부의 혼인서약서, 빚 보증서와 신원보증서, 토지매매계약서, 뉘 집 자식 쌈질 화해서 등등, 좋은 일, 나쁜 일 많이 참견을 하시고 그 증거로 도장을 찍으셨을 것이다. 그 많은 의사 표시에 어떤 흠도 남기지 않으신 아버지의 도장찍기-. 나는 산읍의 한시대사의 메모리 칩 같은 도장을 들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백지에 이 도장을 찍어 보면 아버지의 그 생애가 보일 것만 같아서 도장을 잘 간수고 대물림하고 싶어졌다. 어머니께서 이 도장을 불에 넣지 않고 내게 건네주신 뜻도 그러신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