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수루 앞에서
저녁 때 유람선은 해금강을 돌아 한산섬 선착장에 접안했다. 몇 시에 출발하니까 그 안에 섬을 돌아보고 꼭 시간 맞춰서 승선해 달라는 선장의 당부를 듣고 상륙했다.
이순신 장군의 수루(戍樓)는 바다가 한산섬 안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언덕 위에 있었다. 금방 비가 내릴 듯 낮게 가라앉은 하늘, 해묵은 울창한 소나무 숲은 장군의 수심만큼이나 컴컴하게 깊다. 활처럼 휜 만 기슭을 아내와 숙연한 마음으로 걸었다. 유람선에서 그렇게 신명에 겨워하던 관광객들도 삼삼오오 손을 잡고 조용조용 속삭이며 걷는다.
파도가 이는 거친 해금강 앞 바다에 비해서 만은 너무 고요했다. 나는 방금 적함에 패하고 돌아온 장군의 막료(幕僚)처럼 만감에 목이 메어 ‘장군님-!’ 하고 마음속으로 불러 보았다. 저만큼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갑옷과 투구를 정제하신 장군이 장검을 집고 서서 친히 못난 막료를 맞아 주며 ‘오냐, 수고했느니라.’ 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수고를 했으랴! 나는 과연 이 사회의 일선에서 한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균처럼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모함이나 하면서 비겁하고 무책임하게 내 안일을 도모했을 뿐이다. 그런 나를 그저 그윽하게 바라보아 주시는 제승당의 그 어른 영정 앞에 나는 졸지에 삶의 허물들이 서럽기만 했다.
임진왜란 때 이 섬 안은 얼마나 소란스러웠을까. 부상당한 수군들의 신음소리, 전선(戰船)을 조선하고 수리하는 목수들의 톱질과 망치질소리, 출전 채비를 하는 수군들의 조련(調練)소리---. 아비규환(阿鼻叫喚)같은 해전의 전진기지였을, 이 한산섬 안에서 다만 국가와 민족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는 장군의 우국충정(憂國衷情)만이 고요하게 무릎을 꿇고 수루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원균 같은 처세술이 득세를 하는 이 시대의 통분을 그 어른의 시조로 달래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 섬의 정취가 더 없이 가득한 달밤, 장군의 혼백은 수루에 홀로 앉아서 이 시대의 국가 안위가 걱정되어 여전히 시름에 겨워 우렁우렁하는 목소리로 시조를 읊을지 모른다.
“뚜우-, 뚜우-.”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다는 유람선의 기적소리였다. 우리는 장군을 홀로 남겨 두고 저무는 섬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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