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鳥嶺山
조령산은 소백산맥의 당당한 일봉(一峯)이다. 1025m의 무시할 수 없는 높이뿐만 아니라, 이 산이 품고 있는 <세재>의 역사적 의미로도 소홀하게 여길 수는 없는 산이다. 연풍(延豊) 쪽에서 보는 이 산의 서쪽 산봉우리는 화강암의 넓은 활강면(滑降面)으로 이루어졌다. 언뜻 보면 마치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는 큰스님의 고고(孤高)한 탈속(脫俗)의 기풍이 느껴지는 얼굴 같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는 말은, 연풍 사람들의 경우 조령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삶에 엎드려 있다가 ‘아이구 허리야’ 하면서 허릴 펴면 조령산이 보였다. 마치 ‘할말 있으면 해’ 하는 것처럼 편한 대면(對面)을 해주어서 연풍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 듯 머뭇거리며 조령산을 한참동안 바라보는 것이다.
연풍 국민학교 대운동회 날, 나는 백 미터 달리기의 출발선에 서서 뛰는 가슴으로 높푸른 가을 하늘 가득히 늘어진 만국기 사이로 조령산을 바라보았다. 본부석 천막 아래 면내 유지들과 나란히 앉아 계시는 아버지의 체면을 보든지, 운동장이 잘 바라보이는 둑 위에서 따가운 가을 땡볕을 정수리에 이시고 달리기를 막 출발할 손자를 지켜보시는 할머니의 바램을 생각하든지, 나는 반드시 백 미터 달리기의 등수(等數)안에 들어야 했다. 피할 수 없는 경주의 출발선, 그 작은 운 명 앞에서 나는 끌려 나온, 목매기송아지의 역성을 바라는 ‘음매’ 소리 같은 마음으로 조령산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봄, 우리의 죽마고우들은 조령산에서 흘러오는 이강들 개울에서 천렵을 했다. 개울에는 물 반 고기 반이었다. 피라미, 꺽정이, 참마주, 모래무지, 등바우---등, 그 풍요로운 어획량에도 불구하고 그 때 우리의 마음은 가난했다. 우리는 갑자기 제 인생을 경주해야 하는 절박한 신세가 된 게 슬퍼서 자위(自慰)의 천렵을 벌린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누구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누구는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 누구는 낯선 대처로 고용살이를 떠날 것이다.
매운탕은 끓고, 노을이 졌다. 우리는 술이 취했다. 드디어 우리는 젊음이 고양(高揚)되어 발악을 하듯 노래를 불렀다.
그 때 바소쿠리에 노을만 가득 담은 지게를 지고, <밀레>의 농부 같은 어른이 우리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앞에 서 있었다.
돌아가신 풍산 어른이었다.
“술은 그렇게 먹는 게 아녀 -, 저 조령산같이 먹어야 하는 거여 -. ”
그 어른은 지게를 벗어 놓고 우리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작으로 술을 한잔 들고 우리에게 술잔을 돌렸다. 그렇게 노소(老少)가 어울려 취했다.
우리는 조령산을 바라보았다. 노을을 담뿍 받은 조령산은 술이 잘 취한 어른의 거나한 얼굴처럼 유유(悠悠)했다. 말은 풍산 어른이 하고 우리는 조령산을 바라보며 듣기만 했다.
“마음으로 조령산을 바라보면 철이 난 거야”
그날 풍산 어른이 한 말 중에서 늘 기억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다.
풍산 어른은 왜정시대에 일본 유학까지 한 분이지만, 겨우 해방 전에 금융조합 서기를 좀 해보았을 뿐, 농부처럼 들녘에서, 건달처럼 장터거리에서, 어부처럼 냇물에서, 약초 채취 꾼처럼 산에서, 사람과 자연과 잘 어울려 살아 왔다. 누구든지 그 어른을 어울린 자리에 끼워 주고 그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풍산 어른, 어쩌면 조령산처럼 삶에 구애(拘碍) 받지 않은 의연한 생애를 남긴 분인지 모른다. 나는 그 분의 생애가 무척 부러웠다.
고향을 떠난 지 몇 해후, 어느 여름이었다. 나는 우수(憂愁)에 찬 귀향을 하고 있었다.
연풍이 종착지인 낡은 완행버스는 해가 설핏한 자갈길을 불 맞은 멧돼지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펑크라도 나서 버스가 어두워진 후에 연풍에 도착했으면 하고 바랬다. 사업을 한답시고 소중한 부모님의 땅 몇 마지기를 얌전히 날린 떳떳치 못한 몸을 남에게 보이기 싫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마음과 관계없이 버스는 잘도 달렸다. 이제 연풍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달리면 노을 질 무렵 연풍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배라도 한 대 피워 물고 오늘 하루의 무사운행을 감사하며 느긋하게 운전을 해도 무방하련만, 누가 자기를 연풍에서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과속을 하는 운전사의 마음에 납득이 안 갔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빈집이었다. 아직 부모님이 들에서 돌아오지 않으신 것이다. 나는 서둘러서 여울 낚시 도구를 챙겨 가지고 이강들 개울로 나갔다. 부모님을 보일 낯이 없어서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피라미들이 노을을 따먹으려는 듯이 눈부신 작은 은빛 몸을 수면 위로 솟구쳐 본다.
나는 귀향을 핑계 대려고 조령산을 쳐다보았다. 조령산은 ‘듣기 싫어!’ 하며 나를 질시(疾視)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러워서 목이 메었다. 백 미터 달리기에서 등수 안에 들지 못하고 운동장 둑 위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 곁으로 비질거리며 돌아오다가 바라보던 조령산은 분명히 ‘괜찮아 잘 뛰었어.’ 하며 눈물이라도 닦아 줄 듯한 얼굴이었는데, 오늘의 조령산은 엄격하고 매정했다.
그 운동회 날 백 미터 출발선에 우리 반 애들을 인솔 해다 세워 놓고 담임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꼭 등수 안에 들어야만 잘 뛴 건 아니다. 힘 맘껏 뛰면 되는 거다.”
내 사업을 위해서 나는 힘 맘껏 뛰었을까? 나이 어린 촌놈이 낯선 백 미터 출발선에 낯선 주자(走者)들과 섰을 때, 지레 겁을 먹고 엉뚱하게도 문득 풍산 어른의 ‘온전(穩全)한 자유인의 생애’를 그리워하며 출발선에 주저앉아 기권을 한 꼴이었다. 인생의 의미를 확립하지 못한 주제에 조령산 같은 풍산 어른의 생애를 넘보다니 가당치 않은 핑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핑계까지 들어주려니 하고 조령산을 쳐다 본 나는 숙맥이 아니면 뻔뻔스러운 놈임에 틀림없다.
그때 등 뒤에서 기쁨에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잘 뭅니까?”
뒤를 돌아보니 내가 타고 온 버스의 운전사가 밝은 얼굴로 친구처럼 격의 없이 내 곁으로 다가서며 여울 낚싯줄을 물살에 풀어 넣었다.
나는 한 마리도 낚지 못하는데 그는 연방 피라미를 낚아서 앞에 찬 종다래끼에 담았다. 나는 뒤통수로 조령산을 의식하며 건성으로 낚시를 물살에 드리우고 있는 반면, 그 운전사는 맘껏 낚는 기쁨을 즐기고 있었다. 자기 삶에 만족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물고기를 낚는 집중력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연풍 도마리(숙박하는 운행 종착지)가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령산을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 이렇게 중얼거린 게 아닐까 싶다.
“조령산! 참, 좋은 산입니다. 저-, 보세요. 꼭, 수고했다.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나는 다시 돌아가서 백 미터 출발선에 서리라고 마음먹고, 조령산을 돌아보았다. 이미 어둠에 묻히는 조령산이 알았다는 듯이 안도(安堵)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후회는 남기지 않도록 해야지-. 최선(最善)을 다한 미달(未達)에는 구태여 핑계가 필요 없느니라.'
그때, 조령산은 그렇게 내 등을 밀어 주었다.
“버스가 내일 아침 몇 시에 출발합니까?”
내가 운전사에게 물었을 때,
“새벽찹니다.”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열심히 낚싯줄을 채고 있었다. 조령산을 등지고 낚시질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목판화의 양각(陽刻)처럼 뚜렷하게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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