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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와 이슬람의 태동

Joyfule 2017. 9. 5. 23:30

 

무하마드와 이슬람의 태동
  

 1. 이슬람 출현 전의 아라비아반도

6세기 후반에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의 산조 사이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아라비아 반도를 무역로로 선호하였다.

무역의 요충지로 메카에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이곳이 아랍인들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유대인들은 아라비아로 이주하여 메디나와 예멘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반도 북부 변경에는 기독교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우스파들이 들어왔다.

네스토리아파들은 형식적이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이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아랍어로 된 성경이 없어 바른 기독교 진리의 전파가 부재한 가운데 왜곡된 교리와 이단종파들만이 퍼져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라비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이방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들은 부족신이었다.

 이들은 정령이 수목, 돌, 연못, 동물 등에 깃들이어 있다고 믿는 원시적인 종교를 신봉하였고 위령제나 기원제를 거행하였다.

특히 ‘카바’라는 검은 거석 신전에는 많은 신들을 두고 숭배하였다.

카바에는 많은 조각상과 화상(畵像)이 있어 당시 주위의 다양한 부족들이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하는 성지이며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

2. 무하마드의 탄생과 메카 거주시기

무하마드는 A.D. 570년경 메카에서 이 도시의 지배 부족이고 아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꾸라이쉬족의 ‘하심’가(家)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압둘라’는 작은 집, 5마리의 낙타, 그리고 몇 마리의 염소를 유산으로 남겨둔 채, 결혼 후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고 그 후 몇 달 후에 무하마드가 태어났다.

모친 ‘아미나’ 역시 그가 6세가 되던 해에 사망하여 조부 ‘압둘 무탈립’이 그를 돌보게 되었다. 그의 조부 역시 3년 후에 사망하여 그의 삼촌 ‘아부 탈립’이 양육을 떠맡았다.

상인인 삼촌의 관심 속에서 그는 성장하여 무역상인이 되었다.

20세도 못되어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알레포와 같이 먼 중심지까지 여행하였다.

그는 여행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기독교와 유대교에 접하면 접할수록 그의 부족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무하마드는 당시에 메카에 만연한 우상숭배에 불만을 품었고 유일신 사상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서는 종교간의 불화, 도덕적 타락, 노예착취, 부녀자와 고아의 차별대우 등과 같은 사회 병폐들에 대하여서도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대상무역을 위해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접했으나 이들은 바른 진리에 서지 못한 이단에 속하였다.

이 때문에 무하마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하여 기독교가 하나님과 예수와 마리아, 세 신을 믿는 다신교라는 인상을 받았다.

유일신교를 추구한 그는 기독교를 등지게 되었다.

무하마드가 25세가 되었을 때(A.D.595) 15세 연상이며 두 번 남편과 사별한 부유한 상인이며 그의 고용주였던 카디자가 그에게 청혼하였다.

그의 결혼생활은 카디자가 사망할 때까지(A.D.619) 25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결혼 덕분에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사색하고 기도하기 위해 사막으로 떠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무하마드는 새로운 유일신 종교를 추구하였다.

3. 무하마드의 첫 계시

6개월 간의 명상 끝에 40세의 나이에(A.D. 610) ‘히라’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던 중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주었다. 이 첫 계시의 결과로 후에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이 만들어졌다. A.D. 610년 그 ‘능력의 밤’에 있었던 천사의 출현은 그의 전환점이 되었다. 능력의 밤을 시발점으로 해서 무하마드의 사명은 시작되었다.

첫 계시를 받을 때 그는 공포에 빠졌으나 그 후 그가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A.D.610-632)에 걸쳐서 계시를 받았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최소한 첫 계시의 경험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때때로 그는 입에서 거품을 품기도 하고 어린 낙타처럼 소리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무하마드는 문맹자인고로 글을 몰랐고 당시에 아랍어 성경이 없는 관계로 그는 유대인이 전하여 준 이야기를 통하여 구약에 담긴 유일신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창조자이시며 진실하시고 탁월하신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받아 들었을 것이다.

무하마드는 자신에게 계시를 준 신을 당시 카바 신전의 최고의 신, ‘알라’라고 명명하고 신은 유일한 존재이고 자신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과 같이 알라의 선택을 받은 최후의 예언자로서 알라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알려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계시는 유일신을 강조하면서 모든 우상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알라에 의해 피조된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였고, 심판의 날, 저주 받은 자의 고통, 감각적인 낙원의 즐거움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부인이 첫번째 개종자가 되었다. 그의 세력은 증가하였고 A.D.612년 그의 부인이 사망할 당시에는 그의 영향력은 북으로 400 킬로미터 떨어진 메디나까지 미쳤다. 계시를 받은 후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포교하고 A.D.614년경에는 대중포교에 나섰는데, 몇 년간에 걸쳐서 수백 명의 메카 시민들이 무하마드를 따랐다.

4. 무하마드의 메디나 도주와 세력 확장

무하마드의 추종자들이 계속 박해를 받자 A.D.622년 무하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200여명의 제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히즈라’라고 하는 이 피신의 해는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었다.

이제, 52세의 무하마드와 이슬람종교에게 완전히 새롭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 겸허하고 과묵하고 신실한 사람이 강력한 권력가(군주)가 되었다. 메카에서는 미움을 받았으나 이제는 메디나와 아랍인 전체를 지배하는 정치가 혹은 행정지도자로 변신하였다.

당시에 메디나 주민의 70%는 유대인이었는데, 무하마드는 수적으로 아랍인들이 열세임을 인식하고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조치를 취하여 유대교리와 관습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유대인들도 초기에는 무하마드에게 호의적이었으나 차츰 무하마드가 자신을 알라가 보낸 예언자라고 말하고 특히 성경의 인물에 대하여 부정확하게 언급하자 그를 사기꾼으로 취급하였다. 무하마드는 이내 분개하였고 자신이 설명하는 구약의 사건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때마다 유대인의 경전이 임의대로 개역되고 왜곡되었고 자신이 받은 계시 내용이 맞다고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 및 대학살을 단행하였다. 유대인들은 도시에서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무하마드는 자신과 그의 가족, 그와 함께 메디나로 온 100여명의 추종자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를 공급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메카 사람들의 낙타 대상(隊商)을 습격하였다. 모든 물건을 빼앗고 포로는 몸값을 받고 메카의 가족에게 팔아 넘겼다. 이슬람 종교에서 이것이 성전(聖戰)의 시작이 되었다.

자연히 메카 사람들은 반격하였고 ‘바드르’의 전투가 벌어졌다. 무슬림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300명의 전사로 1000명의 메카 사람들을 정복하였다. 모든 전쟁에서 그렇듯이 이를 알라의 개입으로 해석하였다. 수많은 전투가 있었고 한 번을 제외한 모든 전쟁에서 계속 증가하는 무슬림들이 승리하였다.

메카를 상대로 3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메카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무하마드의 군사력이 강해지자 A.D.630년 만명의 전사를 이끌고 메카를 공격하여 이슬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카바 신전의 잡신들의 형상을 제거하고 그 신전을 알라가 실존하는 무슬림들의 순례와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일생에 남은 2년 동안에는(A.D.631-632) 메카에서의 종교적 통일과 통치력의 강화에 주력하는 동시에 다른 아랍부족에 대한 통치를 확장하고 견고히 하였다. 필요 시에는 군사적 행동도 불사하였다. 그 결과로 A.D.632년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전 아라비아 반도가 이슬람의 세력으로 통일되었다.

 

[제공:선교정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