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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3년 후...43일간의 악몽

Joyfule 2017. 9. 4. 22:31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3년 후...43일간의 악몽

 

[2010.07.23 20:26]




[미션라이프] 꼭 3년이 지났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됐던 그 시점으로부터. 23명은 북부지역 마자르샤리프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뒤 카불을 거쳐 칸다하르로 갈 예정이었다. 그들은 샘물교회 목사와 성도들이었다. 무슬림이 가장 적대시하는 기독교인, 게다가 선교차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명이 죽었고, 사태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43일간의 긴 시간이었다. 당시 위험지역 선교를 비롯해 교회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오해도 오보도 많았다. 살아서 돌아온 피랍자들은 말을 아꼈다. 그들이 입을 열었다. 샘물교회는 피랍 3주기를 맞아 숨진 두 사람의 추모관을 건립하고, 피랍자 가운데 14명의 소회를 담은 책자를 비매품으로 25일 발간키로 했다. 베일 속에 가려졌던 피랍 당시 현장 이야기를 봉사단원들과 정부측 관계자의 말을 토대로 재구성해봤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우리 탈레반한테 납치당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2007년 7월 19일 오전 10시 40분쯤. 카불의 한식당 ‘뉴월드’에서 차를 바꿔타고 출발한 지 40여분 만의 일이다.

23명의 봉사단원을 태운 중고 벤츠 버스는 ‘딱’ 소리 한 번에 멈춰섰다. ‘딱!’

임현주(당시 32세) 선교사는 다급하게 말했다. 섭씨 60~70도를 웃도는 버스 안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저 멀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때 총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딱!’ 정부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자동소총(소련제 AK47)을 들고 버스로 뛰어 올랐다. 총격에도 직진하려던 현지 운전자를 향해 가격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로 소리 지르면서 봉사단원들을 훑어보며 왔다 갔다 하기를 수차례.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나가십시오.”

차는 하행선으로 내려가던 방향을 틀어 왼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입구에서 기관총, 대전차 로켓 RPG 등으로 중무장한 탈레반들이 지켜 선 가운데 봉사단원들은 한 줄로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배형규(42) 목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배 목사는 며칠 전부터 몸살 감기에 코피까지 쏟아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당신들은 손님한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를 방문한 손님들입니다!” 임 선교사가 현지어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탈레반은 유경식 장로(55·현 샘물교회 강도사)와 제창희(37)씨를 오토바이에 태워 대장 앞으로 끌고 왔다. 나머지 팀원들은 배 목사를 부축해 걸어갔다.
2시간 40분 정도를 걸었다. 우물도 지나고, 길에 나와 있는 동네사람들도 봤다. 손인사를 주고 받기도 했다. 탈진 일보직전, 어느 이슬람사원(마을회관) 앞에 도착했다.

3~4명이 그들을 에워쌌다. 가운데는 칸다하르에 가져갈 짐이 잔뜩 쌓여있었다. 탈레반은 가방을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푸는 가방마다 성경이 나왔다. 순식간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뭐냐”고 추궁하는 탈레반에게 봉사단원들은 “역사책”이라고 답했다. 그 때 누군가가 휴대전화를 끄집어냈다. 희색이 만연했다. 탈레반이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에 신경이 쏠린 사이 봉사단원들은 신속히 성경을 품안에 감췄다. 이번엔 회비가 들어있는 가방을 통째로 들고 나왔다. 칸다하르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려고 모아둔 달러였다. 직항노선을 포기하고 이 곳 저 곳 경유해 아끼고 아껴 모은 달러. 송두리째 빼앗겼다.

“안심해라. 안심해라. 우리는 정부군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밤 달이 지면 어디론가 이동했다. 탈레반들은 위성이 추격할 수 없는 시간대에 활동했다. 라이트도 켜지 않고 쫓기듯 달렸다.

21일 밤. 한국에 보내주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모두는 옷을 입고 신속하게 신발을 신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동이 트는 아침은 곧 절망이었다.
22일 일요일. 차 마시러 나오라는 명령에 나갔다. 가로 10m 세로 4m 깊이 1.5m 웅덩이 앞에 서라고 했다. 발 디딜 공간은 30cm 뿐이었다. 배 목사는 그만 발을 헛디뎌 웅덩이로 미끄러졌다.
초다리(머리부터 발목까지 가리는 자루)를 뒤집어 써 눈만 보이는 탈레반들. 총알을 엑스자로 온 몸에 감았고, 어깨에 박격포까지 메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구나.’

전날 봉사단원들은 “저들이 한국군 철수나 더 큰 협상안을 갖고 나오면 우리는 살아나가기 힘들 것이다”라고 판단했었다.
탈레반들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쓰러지거나 울지 않았다. 평온하게 고요하게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탈레반이고 곧 알카에다다. 테러리스트는 너희와 미국이다. 우리는 신을 위해 이 성전을 계속할 것이다.”

탈레반은 봉사단원 모두에게 이름과 부모님 이름을 차례로 부르게 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그러곤 다시 초소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최초의 동영상은 어디로도 유출되지 않았다. 아니 유출될 수 없었다. 탈레반은 캠코더 작동법을 몰랐다.
또 다른 밤. 트랙터로 ‘운반’된 지역은 광야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과 흙먼지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한 복판에 봉사단원들을 몰아넣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이 나타났다.

“너희들이 한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온 선교사라는 걸 다 들었다!”

한국언론에서 교회 출신 단기선교사라고 보도한 내용을 들었다고 했다.
귓전을 울리는 바람소리에도 노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했다. 임 선교사가 노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칸다하르 병원에 친구가 있다. 그를 도우려고 가는 사람들이다!”

죽을 고비는 그렇게 또 간신히 넘어갔다.
23명이 함께 있던 어느날 밤엔 배 목사가 봉사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큰 협상안을 갖고 나와서 본보기로 한 두명은 처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제가 일어나겠습니다. 제 번호가 1번입니다.” 유 장로가 나이가 많은 자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배 목사는 “장로님 제 자리 넘보지 마십시오”라고 웃으며 넘겼다.
며칠 뒤에 봉사단원은 각각 11명과 12명으로 나누어졌다.

25일 아침. 배 목사의 이름은 탈레반에 의해 불려졌다. “배호중(영락교회 장로).”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름까지 확인됐다. 배 목사는 문 밖으로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배 목사가 세상을 떠난 그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팀은 또다시 나누어졌다. “한국에 보내주겠다. 누가 가겠느냐”는 얘기에 가장 어린 여성 둘과 남성 둘을 내세웠다. 그런식으로 나뉘다보니 총 6개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였다.


첫 번째 차출된 4명은 한국에 보내지기는커녕 토굴에 감금됐다. 무장한 탈레반들은 그들에게 자루를 씌우고 두 손을 결박했다. 폭행과 살해위협이 계속됐다. 그 가운데도 남성들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탈레반 농가에 갇힌 2개 팀만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는 어디나 힘들었다.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했기에, 먹고 자는 곳에서 배변을 해결해야 했다.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어 월경을 처리했을 정도였다.

그 곳이 지옥이었다. 31일 또 다른 희생자가 나왔다. 심성민(29)씨였다. 경상도 사나이로 말수는 적지만 속정이 깊어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잘 챙기던 심씨였다. 심씨 역시 자신의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말하고는 탈레반들에 끌려갔다.
서로의 생사를 알 길은 없었다. 탈레반이 듣는 라디오를 통해 살해자 소식을 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유일한 버팀목은 함께 남은 동료들 그리고 성경 뿐이었다.

탈레반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혼동했다. 해외언론을 통해 전해진 한 여성의 육성 중, “베네딕토 교황님 도와주세요”도 그런 맥락이었다. 탈레반은 인질들을 위협하고 언론을 통해 그들의 육성을 흘리면서 국제사회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한국측과 탈레반 대표간 첫 면담이 가즈니에서 이뤄진 다음날. 탈레반은 아픈 인질 2명을 먼저 내보내겠다고 알려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8월17일. 김지나(32), 김경자(35)씨가 무사 귀국했다.


사태는 그러나 다시 꼬였다. 세 번째 살해위협이 시작됐다. 이번엔 여성이었다. 여성을 살해한다는 것은 그들 율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전략상 가장 자극적인 살해극을 택했다. 남성 1명도 추가로 리스트에 올랐다.
일촉즉발의 순간 막후협상은 탈레반의 다른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가닥을 잡았다. 탈레반은 당초 아프간 주둔 한국군 철수, 탈레반 인질과 포로 교환 등을 요구했다. 탈레반은 또 인질들의 음식 마련에 어려움이 있다며 도움을 요청키도 했다. 한국측은 상당량의 음식과 의약품 등을 보냈다. 피랍자 그 누구도 풀려날 때까지 그 물품을 받아보지 못했다.

8월29일. 아프가니스탄 피랍 41일째, 12명이 풀려났다. 다음날 남은 피랍자들이 풀려났다.
가즈니 적신월사에서 다시 미군기지로, 동의부대로 이동은 계속됐다. 헬기를 타고 카불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들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숙소인 세레나 호텔에 도착해서 2명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모두 오열했다. 밤샘 조사가 이뤄졌다.
9월2일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다. 입국 후에도 한동안 악몽이 사라지지 않았다. 2주간 안양 샘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데는 반 년에서 1년 가까이가 소요됐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이경선 기자
기사원문보기 :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
page=1&gCode=mis&arcid=0003946935&code=23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