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미친 짓이야" 199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 때 정치계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빌 클린턴 후보는 "문제는 경제야, 이 멍청아!(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선거구호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1차 이라크 전쟁에 승리하고 재선을 자신하던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꺾었다. 이후 클린턴은 재임 말년에 백악관 여직원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인해 온갖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재임 8년간 많은 경제적 성과를 낸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는 재임 기간에 미국의 만성적인 쌍둥이 적자(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는데, 특히 두 번째 임기의 막바지에는 쌍둥이 적자 중 하나인 재정적자를 1960년 이후 37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는 혁혁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클린턴의 시대가 끝나고 아들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에도 성공하자 부시 일가의 새로운 전성기가 시작되는 듯했다. 아들 부시는 재임 1기에 '테러와의 전쟁'으로 전 세계를 요란하게 뒤흔들더니 재임 2기에는 아버지가 소홀히 했던 국내경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감세정책을 기반으로 한 경기부양 정책을 실시하면서 미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들 부시의 경제정책은 미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는커녕 그동안 미국경제에 만성적이면서도 구조적인 문제로 남아있던 쌍둥이 적자를 더욱 심화시키고 말았다. 쌍둥이 적자 문제가 심각해지자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경제의 위기가 현실화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우려하면서 아들 부시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아버지 부시에게 경제를 한 수 가르쳤던 클린턴은 자신이 이룩해 놓은 재정수지 흑자를 아들 부시가 망쳐버린 데 화가 난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아내 힐러리의 대통령 출마를 돕기 위한 정치적 포석인지 그 의중은 알 수 없지만, 아들 부시에게 훈수를 두었다. 그는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중국, 일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돈을 빌려 카트리나 이재민 구호에도 쓰고, 이라크 전쟁에도 쓰고, 나 같은 부자들 세금감면액을 벌충하는 데도 쓰고 있다. … 이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클린턴의 발언은 말이 훈수이지, 부시 일가에는 엄청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클린턴은 아버지 부시에게 '멍청이', 아들 부시에게는 '정신병자'라고 말한 것 아닌가. 조세감면, 테러와의 전쟁, 군비지출 등이 원인 물론 우리의 관심은 클린턴이 부시 부자에게 독설을 퍼부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 정도야, 부시의 입장에서 기분 나빠 하고, 정 맘에 안 들면 상종을 안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악연을 만들어낸 배경에 깔려 있는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는 오늘날 미국경제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최대 난적이 되고 있어 무시해 버릴 수가 없다. 미국의 재정수지는 2000년에는 2360억 달러 흑자였으나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 2002년에 1578억 달러(국내총생산 대비 1.5%)의 적자로 반전됐고, 2004년에는 4121억 달러(국내총생산 대비 3.6%)의 적자를 기록했다. 3년 연속 적자였던 셈이다. 이러한 미국 재정적자의 증가는 아들 부시가 추진한 조세감면을 통한 경기부양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전개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차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비 지출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그 규모나 증가속도가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 정도다. 예를 들어 2001년 6월부터 시작된 조세감면 정책은 10년간 1조3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필요로 하며, 2001년 이후에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차 이라크 전쟁, 테러와의 전쟁에도 300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이 긴급히 지출됐다. 한마디로 아들 부시는 재정수입을 늘리는 데 필요한 조세수입은 줄이고 정부의 돈은 물 쓰듯 써버렸고, 이로 인해 미국에 엄청난 재정수지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주문을 외워 불러낸 저승의 힘, 미국의 재정적자 그런데 이러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정적자는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에 심각한 위협요인이 된다. 우선 심각한 재정적자는 그것을 보전하기 위한 추가적인 국채발행을 늘려 금리상승을 유발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민간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세감면에 따른 경기상승 효과는 있겠지만, 미국경제의 성장을 이끌기 위해서는 투자지출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미국 재정적자의 확대가 미국 경제성장에 미칠 영향은 우려할 만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경제가 침체되는 탓에 자칫 세계경제가 동시불황으로 진입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또한 재정적자의 확대에 따른 이자율의 상승은 해외자본의 미국내 유입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고, 이러한 해외자본의 미국 유입은 달러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더욱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매우 큰 상황이기 때문에 달러 약세는 달러의 신인도 문제로 연결될 공산이 크다. 미국 쌍둥이 적자의 다른 한 축인 경상수지 적자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확대되어 2004년 6681억 달러(국내총생산의 5.7%)를 기록했는데, 다른 나라의 경우 이 정도의 경상수지 적자라면 국가파산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재정적자의 확대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달러 신인도의 문제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다. 대규모 재정적자로 인한 미국경제의 침체 가능성과 달러 신인도의 하락은, 비유하자면 주문을 외워 불러낸 '저승의 힘'과 같다. 저승의 힘을 불러내긴 했지만 그 힘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 같은 처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빠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마법사의 통제를 벗어난 저승의 힘은 이제 미국경제뿐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전체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통제력 상실"이라는 그린스펀 발언의 의미 2005년 9월 26일 미국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이 한 말은 미국의 재정적자가 지닌 문제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 준다. 그는 프랑스의 티에리 브레통 재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재정적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그가 2004년 4월 말 미국 상원 예산위원회에서 했던 "기록적인 재정적자가 미국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그린스펀의 발언은 국내외에 미국경제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그 해결을 촉구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린스펀의 의도는, 미국 재정적자가 확대되어 달러 신인도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경제가 붕괴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1985년 '플라자 합의'와 같은 달러 약세를 용인하는 새로운 국제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또한 미국 밖에서 미국 재정적자의 심각성을 언급함으로써 미국 재정정책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포석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그린스펀의 말은 미국의 재정적자의 확대가 지니는 심각한 위험성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이다. 미국 재정적자의 확대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아들 부시 정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그것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될 조세감면 정책, 수렁에 빠져 있는 이라크 전쟁,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카트리나 피해를 복구하는 데 드는 비용,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에 따른 사회보장 지출 증가와 같은 요인들은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장기간 지속될 것이며, 미국경제가 언젠가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춤추는 미국경제, 요동치는 한국경제 미국의 심각한 재정적자 확대와 미국경제의 불안정은 한국경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소비지출의 위축으로 인한 내수부진과 수출산업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양극화되어 있는 한국경제의 구조를 감안할 때, 미국으로부터 들려오는 불길한 경제소식은 바다 건너 남의 집 불 구경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미국경제가 침체한다면 한국경제의 수출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한국의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다. 물론 수출부진을 내수를 살려 상쇄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경제의 내수 문제는, 신용불량자나 비정규직의 문제에서 보듯 일시적인 경기순환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2002년부터 시작된 달러의 약세가 미국의 재정수지 적자 확대로 인해 지속된다면 한국경제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되어 수출은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단지 양적 성장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양적 성장의 한계가 가져올 한국경제의 질적 변화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경제의 경기침체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수출경쟁력의 약화와 한국경제의 장기침체는 노동비용의 억제, 노동에 대한 공세 강화를 통한 비용축소로 이어질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한국 자본의 해외진출을 가속화하여 기업활동의 초국적화를 촉진할 것이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고삐 죄기'로, 다른 한쪽에서는 '탈출하기'로 한국경제의 구조는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재편될 것이다. 따라서 고용안정이나 소득분배의 양극화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우리가 여전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마수에 사로잡힌 채 세월을 보내할 것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된다면 미국의 재정적자는 우리에게 더욱 더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경제는 춤추고, 한국경제는 요동치고 하면서... '━━ 지성을 위한 ━━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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