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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강한 원화

Joyfule 2014. 5. 11. 07:51

 

 

 

[서소문 포럼] 반갑다! 강한 원화

[중앙일보] 입력 2014.05.08 00:02 / 수정 2014.05.08 00:06
김광기
이코노미스트·포브스 본부장

 

세월호 참사에 가려 주목을 끌지 못한 경제 변수가 있다. 환율이다. 원화가치의 상승(환율 하락)이 예사롭지 않다. 미 달러화에 견준 원화 값은 최근 한 달 새 약 4% 올라 단숨에 1020원대로 들어섰다. 이제 달러당 1000원 고지와 그 너머 900원대 평원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최근 황금 연휴를 해외에서 보낸 사람들은 강해진 원화의 혜택을 톡톡히 봤을 법하다.

 과거 같으면 ‘수출에 빨간불’ ‘기업 채산성 악화’ 같은 소리가 컸으련만 이번엔 차분하다. 세월호 참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환율에 대한 국민의 인식 전환으로 해석하고 싶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이니 원화는 약세(고환율)일수록 좋다’던 생각이 ‘그렇게 수출 기업들 밀어줘 본들 뭐가 좋아졌느냐’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국민들은 그동안 정부의 ‘고환율 정책’을 잘 참고 따라줬다. 가난하던 시절 장남 대학 보내기 위해 동생들이 학업을 포기했던 것과 같은 이치로 여겼다. 장남이 잘되면 집안이 일어나고 동생들도 덕을 볼 걸로 생각했다. 한참 동안 실제 그랬다. 수출 기업들 덕분에 경제 성장이 활발하고 일자리도 늘어났다.

 하지만 이런 ‘낙수 효과’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특히 그렇다. 수출 대기업들은 여윳돈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됐지만 국내 투자와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사실 2008년 이후 원화 약세는 지나쳤고, 수출 기업들에 과도한 혜택을 안겨준 측면이 있다. 원화가 강했던 2006년(연평균 원달러 환율 955원)과 2007년(929원)에도 수출은 잘됐다. 2007년 수출은 전년보다 14.1% 늘어났고 경상수지 흑자도 118억 달러에 달했다.

 최근 몇 년 새 경상수지 흑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출 기업들의 제품 혁신과 세계 경제의 회복 덕분이지만 약한 원화가 기름을 부어준 것은 분명하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무려 799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6%를 넘었다. 여기에는 수입 위축(-0.8%)도 한몫했다. 과도한 원화 약세 탓에 내수가 억눌린 결과로 볼 수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국민들은 약한 원화 때문에 수입 제품을 비싸게 써야 했다. 예컨대 휘발유나 가스를 소비할 때 L당 수십~수백원씩 더 냈다. 한국의 연간 석유류 순수입액이 600억 달러(약 60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원화가치가 5%만 저평가돼도 전 국민이 연 3조원을 더 쓴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부가 치르는 비용도 크다. 외국환평형기금 이자 등 외환시장 개입 비용이 연간 2조~3조원에 달한다. 경상수지 흑자로 국내에 풀리는 돈을 흡수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부담하는 통화안정증권의 이자도 막대하다.

 최근 원화가치의 상승은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원화가치가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국제수지 흑자가 많이 늘어 걱정이다. 균형에 가까운 흑자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경상수지 흑자가 불어나면 통화가치는 결국 오르게 마련이다. 게다가 올해 한국의 GDP 성장률은 3.7~4.0%로 높아질 전망이다.

 원화 강세가 대세라면 잃는 것을 줄이고 얻는 것을 최대한 키우는 지혜가 요구된다. 침체된 내수를 살려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모색하면서 경제 전반의 양극화를 해소해 나가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규제개혁 성과와 맞물릴 경우 그 효과는 의외로 클 수도 있다. 수출 대기업들은 이미 해외 생산 확대와 결제 통화 다변화 등으로 원화 강세에 대비해 왔다. 중소기업이 걱정인데, 정부는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줄이면서 시간을 벌어주는 정책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원화 강세의 속도가 너무 빠를 경우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 카드로 맞불을 놓을 수도 있다. 어차피 물가 걱정은 없는 가운데 세월호 참사로 내수가 가라앉는 상황이니 말이다.
 
 싱가포르는 1960~80년대에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개도국이었지만, 현재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의 선진국이 됐다. 여기에는 강한 싱가포르달러가 한몫했다. 싱가포르는 90년대 이후 통화가치를 키우면서 금융·관광·의료·물류·교육 등 내수 서비스산업을 본격 육성했다. 한국도 지금 그런 갈림길에 서 있다.

김광기 이코노미스트·포브스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