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 꽃 - 청호
초가을 햇볕에 밭이랑 한 편이 하얗게 한들거린다. 여름 꽃은 거의 지고, 가을 꽃은 아직 시작되기 전에 핀 부추 꽃이다.
부추의 초록빛 가녀린 잎 사이로 올라온 줄기에 하얀 별꽃처럼 작은 꽃이 오종종하게 모여서 피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워낙 작아서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예쁜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꽃이다.
부추는 다년생이어서 한 번 심으면 이듬해에는 뿌리가 더 실해진다. 단오 무렵부터 베어 먹기 시작하여, 곧 다시 자라서 봄부터 가을까지 수월하게 구할 수 있는 반찬거리이다. 출가 전, 어머니는 여름 김치에 부추를 넣으면 잘 시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몇 번을 베어도 씨를 맺으려고 핀 하얀 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이 살아 보려 노력하고 마침내 살림을 일군 여성을 보는 듯하다.
호박을 따러 갈 때면 덩굴 때문에 보이지 않는 뱀이 있을까봐 조심한다. 억센 털이 있는 호박 덩굴을 타고 올라 온 뱀을 본 일이 있었다. 그 후로 호박 주변에 몸을 숨기기 좋은 잡초가 나오면 무서워서 뽑아야 했다. 그것을 알게 된 W 보살님이 몇 년 전, 밭 가장자리에 부추를 심었다.
절에서는 오신채라 하여 다섯 가지 먹지 않는 채소가 있다. 그 중에 부추도 포함되어 먹지 않는다고 했더니 풀을 매는 것 보다는 낫고, 내가 안 먹으면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그 말도 맞았지만, 꽃을 보고는 자리를 만들어 채소를 겸하여 화초로도 가꾸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여 기계의 힘으로 산이 없어지고 개펄이 메워지는 시대가 되었다. 식물도 예외가 아니어서 원예 종으로 개량되고 있다. 개량을 하면, 개화기간은 길어지며 꽃은 더 커지고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나는 개량된 품종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피는 모든 풀꽃을 좋아한다,
들에 지천으로 피는 냉이 꽃이나 노란 꽃다지가 없다면,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이른 봄을 무엇으로 환하게 하겠는가. 초여름 힘이 빠지는 더위에 노란 애기똥풀이나 보랏빛 꿀풀을 만나면 길을 멈추고 잠시 미소를 짓게 한다. 내가 흔하디흔하다는 들꽃을 귀한 화초인양 심는 이유다.
마당 여기저기에 어디선가 날아와 싹튼 산 달래가 오월이 되면서 훌쩍 긴 꽃대가 올라왔다. 부추나 달래는 꽃 모양이 비슷하다. 연 분홍빛 달래 꽃이 신기하여 보여주면, 보살님들은 대부분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봄나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달래 꽃은 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부추 꽃이나 달래 꽃은 예쁜 들꽃 중에 하나이다.
올해는 부추의 포기가 많이 늘어 보살님들이 좋아하였다. 베어내면 다시 자라 여름 내내 몇 번이나 가져갔다.
구월이 되자 높은 뒤 밭에 별 같은 하얀 송이 송이가 무리를 지어 만발하였다. 한 가지를 꺾어다 식탁 위에 꽂았더니, 자주 오는 도반 스님은 저것도 꽃이냐고 놀렸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거의 같은 편인데, 부추 꽃에 대해서는 언제나 서로 생각이 달랐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석 달 동안 반찬이 되어 주고 피는 저 하얀 꽃을 왜 예쁘다고 하지 않는지?
밭을 둘러보고는, 또 자랄 수 있게 얼른 베지 않고 저 모양이 되도록 두었다며 한 마디 했다. 꽃이 좋아서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가는 물정 모른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하는 우리의 대화였다.
늦장마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골목, 어느 집 담장 아래 하얀 꽃이 무더기로 있었다. 마침 함께 있던 도반 스님이 예쁘다고 하여, 드디어 기회를 만난 나는 의기양양하게 부추 꽃이라고 했다.
그 때 도반스님에게 들은 말이다.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노천명 시인의 장날이라는 시 알죠? 시골에서는 부추를 베어다가 팔아야 돈이 되어 양말과 공책이 생겨요. 나는 부추에 꽃이 피면 엄마가 걱정하시는 것을 보고 자랐어요. 농사일이 바쁜데도 꽃대를 다 가려내야 되어요. 스님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 꽃이 피면 걱정거리로만 보였어요. 오늘 비속에서 보니까 예쁘네요. 이제부터 좋아질 것 같아요.”
우리는 십 년 지기이다. 서로 공감대와 이해하는 폭이 크다고 생각하였으나, 부추 꽃이 싫다던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시골에서 자란 도반 스님은 꽃을 꽃으로만 볼 수 없었고,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부추가 공책이 되는 것을 몰랐다. 그 날에야 우리는 서로 다른 부추 꽃을 알았다.
그 날 후, 뒤뜰에 핀 꽃을 보면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것이 부추 꽃 하나뿐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 어떤 부분을 아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오신채: 파. 마늘. 부추. 달래. 홍거(우리나라에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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