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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2) 희망에세이 중에서... 박동규

Joyfule 2012. 10. 2. 11:16

 

 

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2) 희망에세이 중에서... 박동규

 

찻값 때문에 볼모가 되었던 소공동 시절 -  박동규

 

 

지하철에서 내려 문득 계단을 올려다보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입구 저편의 하늘에는 선명하게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있었다

찬바람이 옷깃을 휘어잡는 가을이 온 것이다.

 

조금  빨리 가로등이 켜지는 가울이 오면 대학 시절의 가을이 생각난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문학을 전공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곤 했다. 오후 강의가 끝나면 동숭동에서 창경궁 담을 끼고 걸어서 소공동의 어느 다방에 모이곤 했다. 우리가 소공동에 있는 큰 다방에 자리잡게 된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였다. 명동 쪽으로 가고 싶어했지만 한 친구가 답답한 곳이 싫다고 우겨서 소공동 다방으로 정한 것이다.

 

찬바람이 제법 불던 어느 날 저녁, 나는 생전 처음 한 여대생을 소개받기로 했다., 오후 여섯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조바심이 나서 다섯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다방에 앉아서 기다렸다. 워낙 돈이 없었던 때라 집에서 나오면서 친하게 지내던 동네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게 다섯 잔의 커피 값을 꿔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갈 버스 값을 제하고 나면 네 잔의 커피 값이 있었다.

 

다섯 시가 되자 친구가 왔다 그리고 15분쯤 후에 여대생 일곱 명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넉 잔의 커피 값밖에 없었지만 할 수 없이 커피를 주문하였다. 나와 만나기로 한 여대생의 친구들이었다. 한 참 있다가 여대생 모두가 일어서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황당했다.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고자 한 여대생이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는 배시시 웃으며 '가운데 앉아 있던 흰 블라우스를 입은 애야.' 하면서 다시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구는 곧 바람같이 얼어나더니 '찻값은 네가 내.' 하고는 여대생들을 따라 나가 버렸다. 그제야 친구가 여대생들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골탕을 먹이고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찻값이 문제였다.

 

식은 커피를 입안에 넣었을 때는 한약과 같았다. 식은 커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틈틈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만져 보았지만 찻값이 될리가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아까 다녀간 흰 블라우스 입은 여대생이 들어왔다.

 

그녀는 내 앞에 앉더니 '찻값이 없어서 아직 앉아 있는 거죠?' 하고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나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른 일어나서 카운터에 가서 찻값을 치르더니, '다른 다방으로 가요.' 하고 앞장을 서는 것이었다. 명동에 있는 어느 다방에 들어가서 커피를 앞에 놓고 마주 앉자 그녀는 '친구가 나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는 말을 그 다방에서 나와서 처음 들었어요. 그리고 친구가 찻값이 없어서 아직 잡혀 있을 거라고 해서 왔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을 밤 공기처럼 차디찬 커피를 입술에 대고 있었지만, 마음은 허망하기만 했다. 어깨가 축 처져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덕수궁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같은 방향이라면서 따라와 곁에 서 있던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대생에게 철없이, '커피 두 잔 값은 있는데요.' 하고 쳐다보자 그녀는, '다음에 우리끼리 만나서 다시 마셔요.' 하였다. 그런데 바보처럼 그녀의 이름도 소속도 부끄러워 물어 보지 못하고 버스가 오자 그냥 올라타고 말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이제 찬바람이 부는 가을밤, 커피 잔을 들면 가난했던 시절의 쓰라림보다는 따뜻했던 그녀의 마음이 커피의 짙은 향기로 변해 기약 없는 이별의 아련함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박동규

박목월시인의 아들 서울대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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