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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정치지도자들

Joyfule 2006. 8. 17. 01:41

 

국가미래 바꿔놓은 고집불통들

 

 

천안문사태 때의 덩샤오핑
"인민은 내게로 돌아올 것"
끝까지 부시전화 안받아


▲ 일러스트=정인성기자 1008is@chosun.com
비범한 정치지도자들의 역정을 담은 평전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삶의 고비를 넘기는 지혜와 안목을 가져다 준다.
 
더구나 잘 쓴 평전은 베스트셀러 소설보다 읽는 맛도 깊다.
 
뉴스위크 편집장 존 미첨이 쓴‘처칠과 루스벨트’(이중순 옮김, 조선일보사)는 현대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한 두 정치 지도자의 우정을 소개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유럽을 거의 집어삼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칠과 루스벨트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자유민주체제의 존립이 힘들었을 것이다.
 
1941년 미국이 영국을 돕기로 한 선택, 1942년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거둔 연합군의 승리, 원자탄의 개발과 관리통제, 유럽의 해방 등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고비마다 둘의 협력은 빛을 발했다. 두 사람은 1939년 9월11일부터 루스벨트가 죽기 전날인 1945년 4월 11일까지 2000통에 가까운 편지를 주고 받았다.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새해 첫날을 비롯해서 함께 지낸 날만 113일이다.
 
1941년 성탄절 무렵, 백악관에 묵은 처칠이 발가벗고 있는데 루스벨트가 들어왔다. 당황한 루스벨트에게 처칠은 말했다. “보십시오, 대통령 각하. 전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두 사람을 가깝게 만든 것이 환경의 힘이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처칠은“우리의 우정은 세계의 미래를 위한 반석”이라고 말했다.

 

▲ 덩샤오핑(맨 오른쪽)

‘덩샤오핑’(벤저임 양 지음·권기대 옮김, 황금가지)은 시련을 이겨내고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어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지도자의 비전을 보여준다.

 

저자는 덩의 두 아들과 베이징대학 동창으로, 장남 덩푸팡과는 같은 홍위병 부대에서 일했고 문혁 말기엔 함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공과를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그려낸다.

 

덩이 자신의 실리를 위해 신의를 저버리거나 인권을 탄압한 사례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것이 그렇다. 저자는 덩이 마오쩌둥의 철저한 제자였다고 본다.

 

대약진 운동으로 3000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자 류사오치 국가주석은 공개적으로 마오의 노선을 비판했지만, 덩은 절대권위에 복종했다. 하지만그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통해 마오의 무모함을 뼈저리게느끼면서 경직된 이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치가로서 덩의 냉혹함은 1989년 천안문 유혈사태 때 보란 듯이 발휘된다.

 

덩은 부시 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않을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이 상황을 이겨내고 국가를 계속 통제할 수 있다면 그들은 내게 돌아올 것이오.”그의 확신은 현실로 드러났다.

장융과 존 핼리데이 부부의‘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황의방 외 옮김, 까치)은 부시 대통령이 올 초 백악관을 방문한 메르켈 독일총리에게 권할 정도로 푹 빠졌던 책이다.

 

이 책은 마오를 권력 장악에 걸림돌이 된 수많은 동지와 인민들의 목숨을 빼앗은 독재자로 그린다. “평화 시에 발생한 7000만 명이 넘는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인물”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그렇다.

 

‘대륙의 딸들’로 유명한 중국작가 장융은 남편인 역사학자 존 핼리데이와 함께 마오의 가족과 친척, 옛 친구와 동료, 측근을 비롯해 36개국 400여 명을 인터뷰하고 러시아·알바니아·불가리아 등의 문서보관소까지 뒤졌다. 국민당 경찰·정부 문서와 마오 반대자들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중국의 공식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가 많다. 그러나 마오를 권력집착증 환자처럼 그린 대목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자서전’(이산)은 메이지 시기 일본의 근대를 설계한 후쿠자와의 인생 역정을 자기 입으로 풀어낸 기록이다.

 

가장 큰 미덕은 솔직함이다.

 

젊은 시절 술 먹고 패싸움한 얘기까지 나온다. 나가사키에서 난학(蘭學)을 배운 후쿠자와는 1860년 스물여섯 살 때 외교사절을 따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일본은 군함을 이끌고 샌프란시스코까지 항해했다. 후쿠자와는 증기선을 눈으로 본 지 7년만에 일본인이 자기 힘으로 태평양을 건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영어 원서를 무더기로 사 들고 귀국해 동료·제자들과 함께 서양문명을 익혔다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출처 : 21C Leadership for my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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