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기독교자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Joyfule 2019. 12. 12. 21:11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바리새인에 관한 연구

 

"최근의 역사적 바리새인 연구"  신약성서와 유대교 세미나, 권종선 교수님 지도

문제 제기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복음서들은 그들을 예수에 대한 주된 반대 집단으로 묘사한다. 둘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랍비적) 유대주의는 바리새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유에는 서로 상반된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약성서의 독자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데,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이 집단들에 대한 균형있게 묘사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성서를 무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서 오는 몇 가지 공통적인 오해가 있다. 첫째, 바리새인들은 모두가 위선자들이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했다. 셋째, 바리새인이 예수의 죽음 초래했다.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에 반대하는 바리새인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평면적 인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로마 가톨릭의 형식주의를 비난하는 한 방식으로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legalism)을 비판적으로 강조한다. 가톨릭인들은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말하는 복음서의 기록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리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에 제동을 가하는 경향도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노이스너(Jacob Neusner)가 1970년 이전에 바리새인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은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리새인에 대한 오해가 편만함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지혜와 학식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을 바리새인들에게로 소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샌더스는 "언약적 규범주의"를 주장하면서 바리새인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비판하고, 개념의 전이를 시도한다.


바리새인 연구 동향

지난 세기에 바리새인에 대한 연구들은 많은 정치적 및 방법론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골치를 앓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프로그램에 대한 유대적 해석들은 전통적 그리고 진보적인 유대인들간의 현대적 갈등에 의해서 암암리 영향을 받아 왔다. 바리새인에 대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록들은 신약성서의 반-유대적 변증의 무비판적 수용이나 현대의 반-셈족주의에 의해서 그 가치가 하락되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학자들에 의한 바리새인에 대한 변증적 변호는 바리새인을 왜곡시키거나 낭만적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들을 그들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최근의 유대교 학계는 "역사적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한다. 이 분야에 공헌을 남기고 있는 주요 학자들은 노이스너(J. Neusner), 리프킨(E. Rivkin), 살다리니(A. J. Saldarini), 그리고 마슨(Mason) 등이다. 예를 들면 노이스너는 랍비 문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리프킨은 바리새인을 정의하는데 사용될 자료의 범위를 정했다. 살다리니는 1세기 "분파/종파"를 연구하는데 사회 과학적 모델을 소개했다. 마슨은 바리새인을 다루는 요세푸스의 모든 문헌을 문학적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의 연구 결과중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에 관하여 이전의 세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다: 자료의 신뢰성, 바리새인의 기원과 그 역사, 그들의 가르침, 그리고 랍비적 유대주의를 포함하여 당대의 집단들과의 관계. 이러한 질문들의 복잡성 때문에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답변들이 제시되었다. 이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와 이론들을 간략하게 검토하겠다.


가이어(A. Geiger)

가이거의 바리새인에 대한 연구 결과는 19, 20세기의 논쟁의 토대를 놓았다. 그는 힐렐학파를 보다 보수적이고 문자적인 사두개파 및 바리새적인 샴마이학파보다는 환경에 대해 더 자유적이고 적응적이라고 해석했다. 옛 할라카의 엄격성과 바리새인의 새로운 할라카간의 대조는 19세기 독일에서 전통적 유대주의와 개혁적 유대주의간의 갈등을 평행시켰다.


Wlelhausen, Sch rer, Bousset, Meyer
이 네 사람은 예언적 윤리에 대조하여 "후기" 유대주의를 초기 유대주의의 형식적 퇴보로 해석했다. 벨하우젠과 19세기 작가들은 헹겔 철학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고, 또한 진화적 사고는 바리새인을 형식적 그리고 물질적 유대주의의 징조로 간주했다. 이러한 유대주의는 타락하여 기독교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세기 초의 유대인 학자들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바리새인에 대한 기독교인 학자들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금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학계는 J. Lauterbach(진보적인 평신도 지도자들로서 바리새인), L. Ginzberg(가이거의 견해와 유사), L. Finkelstein(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계층과 위치를 연구), L. Baeck(종교적 지배를 추구한 운동), H. Loewe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학자들은 자료들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모순적이거나 개연성이 없을 때에는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R. T. Herford
헤르포드는 기독교적 변증과 반-셈족주의를 중화시키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간했다. 그는 랍비적 문헌에 기초하여 바리새인을 구전 율법에 대한 교사로 묘사했다.


G. F. Moore
처음 두 세기 동안의 유대적 사상에 대한 능란하고 분별력있는 종합, 즉 "규범적 유대주의"(normative Judaism)라는 무어의 연구는 영어권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무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간의 신학적 불일치를 강조했다.


S. Zeitlin
자이틀린은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 용어의 다양한 의미를 구분했는데, 그 의도는 사두개인에 대립되는 역사적 집단이 바리새인이 아닌 "분리자들"의 다른 집단과 구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의 기원을 주전 5세기에 두었고, 종파가 아니라 구전 율법에 초점을 둔 평신도 서기관 운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말한다. 물론 그가 비판적으로 자료들을 사용하지만, 그의 방법론은 특이하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Ellis Rivkin
리프킨의 바리새인 연구의 핵심은 "Defining the Pharisees: The Tannaitic Sources"에 있는데, 그는 이 자료에 있는 "perushim"을 바리새인과 동일시 하면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구축하려 한다. 리프킨은, 자이틀린의 바리새인에 대한 견해를 다소 수정하여, 바리새인을 종파나 운동이 아니라 이중적 율법―구전 율법과 기록된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학자 계층으로 말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무비판적으로 자료들의 역사성을 신뢰하면서, 시대착오적으로 자료들을 연결시켰다. 예를 들면, 이중적 율법의 구분은 야브네에서 유대주의 재건의 특징이다.
리프킨의 근거없는 역사적 진술들은 노이스너와 라이트스톤(Jack Lightstone)에 의해 비판받았다. 라이트스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논쟁을 보이는 텍스트를 연구하고서, 이중적 율법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바움가텐(Joseph Baumgarten)은 동일한 본문을 연구한 후, Tannaitic 본문이 바리새인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리프킨은 요세푸스의 문헌과 신약성서를 고찰함으로 자신의 이전의 논제를 계속하여 주장했다. 요세푸스의 자료에 대한 리프킨의 평가는 코헨에 의해서 심한 비판을 받았다.
리프킨에 대한 두 결론은 이렇다: 첫째, 그는 요세푸스와 Tannaitics의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단순하게 취급했다. 둘째, 리프킨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호감을 갖는다. 리프킨의 접근은 지적인 경제와 정밀함으로 특징된다. 하지만 증거의 복잡성이 직면했을 때, 이러한 장점들은 오히려 단점이 된다. 따라서 랍비 문헌에 대한 이해는 다소 전문적이지 못하다.


Jacob Neusner
노이스너의 유대교 연구는 그의 멘토인 스미쓰(Morton Smith)의 저서에 기초한 것으로 특정 주제들에 대한 견해를 수정한다는 평을 받는다. 따라서 노이스너에 대한 평가는 스키쓰/노이스너의 제안과 노이스너 제안으로 나누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연구 방법론에서 고찰하기로 하고, 다만 랍비적 문헌들에 대한 엄밀한 역사-비판적 분석의 결과를 언급한다. 제 2 성전기의 현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신뢰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들의 가르침은 1, 2세기의 것으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와 시대의 검증을 받은 자료들은 더 신뢰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방법론에 의해서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대한 개연적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요세푸스와 신약 성서의 증거와 관련을 맺게 했다. 예를 들면, 의식적 정결, 십일조와 다른 음식법, 안식일과 축제일 준수 등이다. 노이스너는 바리새인이 하즈모니안 치하에서는 정치적 당파였지만, 헤롯에 의해서 그 자리를 박탈 당했다고 주장할 뿐아니라 또한 바리새인들이 성전 제의나 지배 세력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관심을 지닌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이스너의 바리새적 전통과 랍비적 구전 율법간의 구분, 그리고 야브네에서 발생한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는 코헨(S. J. D. Cohen)의 시도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70년-이전의 바리새인의 모습은 어떻했는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는 복잡하지만, 후기 작품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스미쓰/노이스너의 제안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그 두 학자는 70년-이전의 바리새인에 대한 상대적 비중요성을 과도하게 진술했다. 4QMMT는 쿰란 공동체와 공식적 유대주의간의 차이점에 대한 목록이다. 공식적 유대주의를 특징짓는 율법의 요점들은 랍비의 할라카에도 나오고 랍비적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바리새인에게로 소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점들은 공식적인 유대주의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시각에는 공식적 유대주의와 바리새주의는 다소 동일하게 보였다는 것인가?


노이스너는 바리새주의에서 변화에 대한 기록을 힐렐에게로 돌린다. 힐렐에 관한 랍비적 전승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바리새인에 관한 랍비적 전승을 요약한 노이스너는 그 집단이 전적으로 내적인 모습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헤롯 왕조 시대에 바리새주의는 비정치적 운동이었다고 노이스너는 결론 짓는다. 그 집단의 이러한 모습은 공관복음서의 증거와 일치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노이스너는 집단의 특성상의 변화로 설명한다: 정치당으로 시작하여 조만간에 식탁 교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변화의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 노이스너는 힐렐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힐렐에 대한 자료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노이스너의 방법론은 타당치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노이스너(Jacob Neusner)와 리프킨(Ellis Rivkin)이 제시한 역사적 바리새인(historical Pharisees)에 대한 연구는 요세푸스와 신약 성서의 해석과 더불어 랍비 문헌에 대한 복잡한 접근을 제시했다. 리프킨이 바리새인을 말하는 텍스트를 주된 집단으로 사용하면서 랍비 문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그 주된 집단을 다른 자료들과 기간들에 해당하는 랍비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게다가, 그는 바리새인을 확립된 권위에서 유대주의를 지배하려는 학자들 그리고 유대주의의 국제적 형태 형성자로 잘못 생각한다. 미쉬나와 70년-이전의 현인들에 관한 기록에 대한 노이스너의 해석은 역사 비평적이다. 바리새인에 대한 그의 관심의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근본적이지만, 바리새인을 비정치적 집단으로 특징짓는 것은 어떻게 종교가 1세기에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국면의 일부인지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사회적 상황이 제시될 것이다.


J. Bowker와 H. Mantel
보우커는 율법을 매일의 삶에 적절하게 만들고 제사장의 거룩을 백성들에게까지 확대하려고 한 현자들의 운동에 대한 경멸적인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히르카누스에 의해서 산헤드린에서 추방되었을 때 종파(sect)가 되었고, 성전 멸망 후에 유대주의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의 자료 활용은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맨텔은 랍비적 문헌을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모순이 되는 경우엔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사용한다.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분리가 에스라 시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또한 바리새인을 토라에 대한 학자적 연구의 운동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