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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구약이해와 기독교의 구약이해

Joyfule 2019. 12. 10. 21:03


   

        유대교의 구약이해와 기독교의 구약이해

 


2. 기독교의 구약 이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성서가 예언한 그 구세주이심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라는 그 경전의 그 역사적 뿌리가 전적으로 구약성서 안에 있다고 믿으므로 구약성서(히브리 성서: TaNaK)를 또한 신약성서와 함께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이다.

(1) 구약성서는 구속 주(救贖 主)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 인간 구속사(救贖史)의 책

기독교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속사 약속의 성취라고 증언하는 그리스도 예언의 책이다. 구약성서의 신학적 특징은 실로 “세계, 인간, 죽음”을 비신화화 시켜 그 모두를 창조와 역사의 주 야훼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magnalia Dei, τὰ μεγαλεϊα τοϋ θεοϋ, 행 2:11)에 구속사적으로 예속시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구약성서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①신화적 세력 아래에 있었던 “세계”는 유일신 야훼 하나님의 유일한 역사적 주권에 대한 신앙에 의하여 탈 신화화되어 야훼 하나님의 구속사 안으로 들어 왔고, ②타락과 범죄의 모순이라는 불가해한 신화적 세력 속에 싸여 있던 “인간”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 들어와 신의 구속(救贖)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리고 ③신화의 베일 속에 “절대적 세력”으로 감추어져 있던 “죽음”의 그 실체도 남김없이 폭로되어 야훼 하나님의 구속사적 주권 안에 “상대화”되었다는 것(신 32:39; 삼상 2:6; 시 88:6[7])이다. 즉 모든 것은 “약속→성취의 구원 역사”라는 한 전형적인 구원사의 모델을 육경 안에 모범적으로 그려 보여주신 주신 야훼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한 “거대 기획”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구속사적 증언과 그 역사서술은 신약성서가 전한 다음과 같은 소식, 이른 바, “로고스”(λόγος)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成肉)하였다는 것(요 1:14), 즉 기다리던 메시아인 예수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율법 아래에 들어 왔다는 것(갈 4:4), 그리고 이 소식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되었고(마1:1-23←사 7:14) 동시에 세계사와도 관련되었다(눅 2:1-2; 3:1)고 하는 그 신약성서의 주장과 구약성서의 구속사적 증언이 정확하게 “역사적 상응”을 이루었다고 기독교는 이해하였던 것이다. 즉 구약성서의 일관된 증언인, 인류의 구속에 대한 약속과 구속의 주(메시아)에 대한 약속의 예언을, 유대교가 그 성취를 미드라쉬 전통과 탈무드 전통에 무기한 맡겨 둔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신약성서의 종교(기독교)는 구약성서를 철저히 야훼 하나님의 그리스도 계시”라는 빛에서만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는 초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단순한 한 종교의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정경”(正經: canon)이었던 것이다. 구약성서는 예수의 성서였고 동시에 신약성서 기자들의 성서였던 것이다.


특히, 사제 신학적 관심을 갖고 있는 신약성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성서의 옛 구속사는 전적으로 신약의 그리스도 사건을 지향하였고 또 지속적으로 예언하였다는 것>을 “그 어느 증언보다 강한 증언”의 형식으로 증언하였던 것이다(히 5:5-10; 8:6-13; 9:15; 12:22-24). 즉 옛 제의(祭儀)전통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그 제의전통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영원한 대 사제의 반열”에 “새롭게” 들어서시게 되신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모세가 옛 계약의 중재자(μεσίτης)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하나의 중재자로서 나타나셨으나 그러나 그분만은 여기서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구속사의 절정 또는 중심점(midpoint)에 서신 결정적인 “새 계약의 중재자”이셨다는 것을 강하게 증언하였던 것이다(cf. 갈 3:19).


유대교의 핵심적 실체인 “토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신약종교는 유대교의 미드라쉬 해석 전통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였던 것이다. 즉 “토라”는 신 그 자체이므로 거역의 경우에 받을 신의 징계를 생각하여 그 “토라”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지킬 것”(keeping!)만을 요구하는, 이른 바, “너희가 [토라에 대한] 이 해석(midrash적 해석)에 귀 기울이지 아니하면!!”이라는 경고를 되풀이하는 것만을 최선으로 알고 규례대로 “지킬 것만”을 강요함으로서 마치 “토라”가 인간의 범죄를 폭로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오해하게 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반(反) 유대교 성향도 이러한 토라 오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토라 오해를 바로 잡아 주려는 예수의 토라해석이 유대교의 살해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성격의 “율법주의적인 율법”은 낡은 것이요 옛것이며 썩어질 것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이러한 대응은 “토라”의 본질 자체가 “낡은 것” “옛것” “썩을 것”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신약성서는 예수님은 토라를 폐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토라를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셨다는 것을 강력히 증언하였던 것이다(마 5:17-20; 롬 3:31)


예컨대,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생겨났던 “토라”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를 바로 잡으려고 애썼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토라(구약성서)의 존재 의미 및 그 용도란 인간의 범죄를 폭로할 목적으로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 때문에”(!) 인간들을 그 범죄로부터 방어/방지할 목적으로(구속사적인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데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명/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매우 주목할 만한 증언은, “계약”(διαΘήΧη=토라=하나님께서 남기신 약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한 중재자”(μεσἰτης)의 손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하나의 약속으로 주신 것이라는 증언이다. 말하자면, 계약의 말씀인 “토라”(구약성서)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흠이 있어서 스스로 낡아진 것이 아니라 모세라는 중재자에 의하여 주어진 그 “토라”가 단지 유대인들의 “오해로 인한 거역” 때문에 낡은 것이 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오해로 인한 거역”은 “토라”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실로,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 상응성은 둘 사이의 불가분리적인 구속사적 통일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야훼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는 분명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세 이전시대를 모두 수용한 후(synchronic!)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이르러서야(갈 4:4; 때가 차서야, ὅτε δὲ ἦλθεν τὸ πλήρωμα τοϋ χρόνου) 그 절정(絶頂)에 이르렀으며 그 구원의 역사는 또한 여기서도 끝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을 통하여 유형무형의 교회 예배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2)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에까지 이르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사 8:17; 28:21; 29:14; 45:15, 마 13:44; 요 1:18 , Θεός κεκρυμμένος, ὁ ὤ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ϋ πατρός, Deus absconditus,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낯설고 기인한 일들”의 역사를 증언한 책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행위는 [인간에겐] “숨겨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숨기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되는 한 곳이 거기에 있었고,

그 곳은 그분께서 그 선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구원자가 되셨든 곳이다.

(사 45:15)

 

포로기 말의 저 유명한 익명의 예언자, 이스라엘 최대의 신학자(M. Buber의 말)인 제2이사야가 구약 역사를 심각히 되돌아보는 그 끝자리에 서서 외친 이 명언은 “모든 참 신 인식(神 認識)은 신의 숨으심(hiddenness; Deus absconditus)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한 다.”는 진리를 구약 성서 전체에서 가장 분명하게 천명한 역사해석의 언어이다. 분명, 이러한 예언자적 천명의 배후에는 구약 역사 지평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스스로 자신을 감추신” 그 다양한 구속사적 행위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역사적 행위들은 전적으로 -불가피하게 유형론적인[typological] 관찰을 통해서 볼 때-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대속적인 사건과 연결, 상응을 이루었다는 확신이 전제되어 있었다.

예컨대, 모리아-골고다 유형론(창 22장-롬 8:32; 히 11:19; 약 2:21-23)을 비롯하여 야곱의 얍복 강변의 사건(창 32)-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사이의 유비, 요셉을 통한 감추어진 하나님의 구속사 섭리(특히 창 45:7; 50: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감추어진 신비 사이의 유비 등등으로 이어져서 마침내는 구약역사 끝자락에 서서 예언활동을 한 이사야 52:13-53:12 기자의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대속적인[代贖的] 역할-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역할(행 8:26-40)사이의 상응, 등등의 증언들이 기독교 경전의 핵심 주장과 신학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신학적 문맥에서의 상응, 유비, 일치”의 동형론적인(typological) 현상은 구약이 신약종교(기독교) 안에서 갖는 그 경전적인 권위를 확고하게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러한 불가분리적인 상응성과 통일성은, 그러므로, 유일신(practical monotheistic perspective에서) 야훼 하나님의 결코 중단 없는 그 구속사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건, 이 둘 사이의 역사적 상응을 통하여서만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하다. 예언자 제2이사야가 “스스로 자신을 감추시는 그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을 보았다고 한 그 역설적인 증언(사 45:15)과 그리고 요한복음 기자가 또한 아무도 하나님을 본 바는 없지만(Cf. 출 33:20,23)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하나님)이 [그 보이지 않는 구원자]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계시하셨다고 한 그 역설적인 증언, 이 두 역설이 놀랍게도 구약과 신양에서 서로 정확한 신학적 상응을 이루고 있다는 이 사실

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는 분명 고난 받는 자들의 그 대속적인 수난(부르짖음)을 통하여 구원사역을 펼쳐 오신 야훼 하나님의 그 구속사의 그 절정 또는 전환점에 서 계시는 분이시다.

   

나오는 말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불가분리적인 상응성과 통일성은 오직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의 결코 중단 없는 그 구속사적인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건 사이의 역사적 상응”을 통하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겠다. 즉 이와 같은 역사적 상응을 통하여 신약성서 기자들(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도 ①“토라”에 대한 구속사적 해석, ②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대속성 인식 그리고 ③죽음을 정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구속성(救贖性)에 대한 확신이 구약성서의 그 옛 구원사 증언들과 정확히 그리고 불가분리적으로 상응한다는 것 -구약성서 구속사의 완성이 곧 예수그리스도요 신약성서라는 것- 을 깨달았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라는 그 역사적 뿌리를 제거한 신약성서란 예수 그리스도를 감히 “사람으로 위장하여 땅 위로 걸어 다니는 신”이라는 비난을 받게 만들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실로부터 분리시켜 역사적 뿌리가 없는 “도세티즘” (Docetism)의 환영(幻影)으로 밀어 넣는 엄청난 오류를 가져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가 거두어들인 장본인인 “가라지들”이, 이른 바,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마니교 사상, 신(新)플라톤주의, 종교혼합주의”등등과 같은, 이른 바,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이교성(異敎性)을 위장(僞裝)한 이원론적(二元論的), 다원론적(多元論的) 이단(異端; heretics)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를 경전(經典)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 신약성서로부터 구약성서를 떼어내어 기독교의 경전으로부터 축출하여야 한다는 “마르시온 주의적 성향이 있는 구약 폄훼(貶毁)”는 엄히 경계하여야 할 이교논리(異敎論理)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