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기독교자료

사해 사본

Joyfule 2024. 6. 30. 21:33

 



사해 사본     


1947년 봄, 베두인 목동인 주마 무하메드 Jum'a Muhammed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양과 염소 떼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사촌 두 명과 함께 사해Dead Sea 북동쪽 해안의 절벽 기슭을 거닐고 있었다. 소년들이 속해 있는 타아미레Taamireh 지파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유목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황무지와 위험한 절벽의 구석구석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고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염소를 찾으러 나선 주마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가파른 암벽을 기어올랐고 자신이 서 있는곳 바로 위에 작은 동굴이 두 개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염소가 그곳에 숨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돌을 안으로 집어던졌다. 놀랍게도 둔탁한 '쿵' 소리 대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물처럼 귀중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소년이 있던 곳은 대도시로 번성했던 적은 없지만 유명한 고대도시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몇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롯Lot이 가족들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다가 그의 아내가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는 '소금 성읍theCity of Salt 이 근방 어딘가에 있었고, 19세기 고고학자들은 이 기록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유적을 발견하기 위해 이곳을 찾곤 했다.

주마는 동굴 안으로 당장 들어가고 싶었지만 입구가 너무 좁아서 들어간다 해도 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아 망설였다. 가축 떼를 돌보고 있는 몸집이 작은 사촌 동생이 대신 들어가면 동굴을 쉽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미적거리기만 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결정하기까지 2~3일이나 걸렸다.

다음 날 새벽 동이 틀 무렵 십대 소년인 주마는 사촌들보다 일찍 일어나 절벽 위로 올라갔다. 길이 가파르고 험준했지만 잃어버린 양과 염소를 찾으러 몇 번 오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곳을 무사히 지나 동굴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마는 동굴 안에 금은보화가 담긴 항아리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항아리 대부분은 비어 있거나 먼지가 자욱했으며 한 항아리는 닳고 해어진 가죽 두루마리로 채워져 있었다. 또 녹색 헝겊에 싸인 두루마리도 두 뭉치 있었다. 훗날 이것들은 매우 희귀하고 중요한 고문서로 판명되지만 당시 소년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문자를 이해할 수 없었고,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천막집 기둥에 매달아 두었다.

그러다 두어 달쯤 지나서 주마는 다시 한 번 동굴을 찾아가 더 많은 두루마리를 갖고 돌아왔다. 그리고 베들레헴 시장에 있는 고문서를 취급한다는 골동품 상점을 찾아갔다. 처음에 상인들은 주마가 박물관에서 훔쳐온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적법한 절차를 거쳐 두루마리를 사들였고 우여곡절 끝에 이 두루마리는 예루살렘 정교회 대주교이자 성 마르코 수도원장인 사무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본의 기원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일었다. 어떤 학자는 두루마리의 기원을 기원전 1세기라고 보았고 어떤 학자는 중세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근래에 만들어진 위조문서라고 보는 견해도 나왔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사해(한글 성서에서는 '염해'로 표기_옮긴이) 지방은 고대의 중요한 문헌을 발굴할 수 있는 유적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즈음 국제연합이 이스라엘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자 팔레스타인 지역에 일대 혼란과 갈등이 빚어졌다. 사해 근처에서 발굴 작업을 해야 하는 고고학자들에게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1949년 초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사해 동굴 인근에 보초대를 세웠지만 이미 수십 명의 도굴꾼과 아마추어 탐험가들이 21세기 문명의 잔해를 남겨둔 채 귀중한 고문서들을 가지고 가버린 상황이었다. 수차례 도굴을 당했음에도 동굴에는 수많은 도자기와 헝겊 뭉치들이 남아 있었고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기원전 200~250년경, 혹은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Ⅰ사해 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안

사해 사본이 발견된 동굴로부터 1킬로미터 안팎에 있는 건조한 평원은 오랫동안 키르벳 쿰란 Kirbet Qumrân 혹은 쿰란이라고 알려진 주거지이다. 이곳은 19세기 중엽부터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했지만 사해 사본이 발견된 이후 더욱더 고고학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 이뤄진 철저한 발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쿰란 유적이 동굴 속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쿰란에는 기원전 7~8세기부터 기원후 135 년까지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곳의 유적 대부분이 그리스도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또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문서 대부분을 동굴 속 항아리에 숨겼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쿰란의 유적을 살펴보면 당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높은 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정교한 수로망을 건설하여 생활과 종교 제례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확보했다. 또 문서를 기록하기 위해 탁자를 사용했는데 그 옆에서 딱딱하게 말라붙은 잉크병도 발견되었다.

수십 년간 사해 사본을 연구한 학자 대부분은 쿰란 지역에 공동 이루고 생활한 사람들이 에세네파 Essenes였다고 입을 모은다. 에세네파는 고대 문서에 종종 등장하는 유대교 종파로, 황무지인 쿰란에 정착하여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거나 그리스도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곳곳에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멸망하고 타락한 조국에 남겨진 얼마 안 되는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면서 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외딴곳에 머물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했다. 수도원과 문서에서 발견되는 그들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신앙관은 7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며 여기서는 에세네파가 남긴 여러 개의 사본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

Ⅰ사해 사본이 담겨 있던 커다란 질그릇 토기

사해 사본이 발견된 후 몇 년 동안 체계적인 발굴 작업이 이뤄지면서 쿰란 동굴에서 공동체의 종교 계율이 담긴 문서를 포함하여 수십 뭉치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에스더서 Esther를 제외한 구약성서 전체가 담긴 사본도 있었다. 물론 완결된 형태로 보존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개중에서 몇몇은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기록된 것이었다. 사무엘 상하 사본은 기원전 3세기경에, 다니엘서 Daniel는 원본이 만들어진 지 100년도 채 안 되어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놀라운 것은 세 목동이 처음으로 발견한 17장짜리 이사야서 Isaiah일 것이다. 세로 26센티미터인 이 양피지들은 가로로 나란히 잇대면 장장 8미터에 달한다. 이 외에도 이사야서의 또 다른 사본이 발견었지만 군데군데 빠진 대목이 있을뿐더러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Ⅰ사해 북서쪽에 있는 건조한 평원, 쿰란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9~10세기경 사본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기원전 1~2세기경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로 최초 번역된 뒤 기원후 3~4세기에 활발한 필사과정을 거쳐 보완된 것으로 티셴도르프가 발견한 시나이 사본의 구약 부분과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해 사본 중 구약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른 사본들보다 1,000년쯤 앞선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살던 시절에 구약성서 필사본이 여러 개 있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심증을 확인해주었다. 당시 회람 되던 필사본들은 오늘날 서너 개의 영문판이 몇 개의 단어나 표현에서 근소한 차이만 보이는 것처럼 거의 일치했다. 즉, 사해 사본은 지난 2,000년 동안 성서의 기록이 실제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구약성서의 발견

오늘날 혹자는 성서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을뿐더러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낄지 모른다. 성서는 기록된 지100년도 안 되어 이미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예수가 살았던 1세기경, 유대인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오래된 히브리 성서 사본을 몇 번이고 옮겨 쓰며 사용했다. 그렇다고 성서가 다른 고대 문헌들보다 보존 상태가 형편없었던 건 아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들도 원전을 찾아볼수 없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가령 1세기에 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저작들은 남아 있는 것이 십수 권도 되지 않으며 그중 마지막이라고 추정되는 사본은 카이사르가 활동한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800~900년에야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저작도1세기 말에 쓰였지만 대부분 자취를 감췄고 9세기와 11세기에 만들어진 사본 2권에 의지하여 그 흔적을 더듬어볼 뿐이다. 그리스 저술가도 마찬가지다. "투키디데스"meydicles(기원전 460~400년)의 완결된 필사본은 전부 합해서 10권도 되지 않으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후 9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 원본의 소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서와 성서의 역사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서의 출처를 추적하고 현재 읽고 있는 성서가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게 당연하다.

아래 그래프는 성서, 고대 문헌의 집필 시기(붉은색)와 현존하는 사본의 제작 시기(푸른색)를 표시한 것이다.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전,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레닌그라드 사본이었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구약성서가 처음 기록된 때로부터 1,400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해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원본과 사본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좁혀진 셈이다. 시나이 사본은 신약성서 이후 250~300년 만에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