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 7.
이병철
삼성그룹의 창업자이다.
호는 호암(湖巖).
1926년 서울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 중퇴했다.
193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가
1934년 중퇴한 후 귀국했다.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병철의 경영 철학
1980년 7월 이병철 회장은 전경련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한가한 것을 가장 싫어하고 못 견디는 성미입니다.
TV를 보면서도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이야기합니다.”
이병철은 대단한 독서광이었고 평생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이병철의 성격은 까다로우면서도 귀족적이었다.
167cm의 키에 60kg의 몸무게, 야무진 입매와 단정함, 예리하면서도 온화한 시선.
이병철은 매사에 제일주의를 고집하여 남에게 지는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했다.
이병철의 인상은 차갑고 매서우며 냉혹했고
예리하며 까다로웠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느낌이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반면에
성격이 둥글며 사교성이 뛰어나고 의외로 온화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병철 회장은 유교적 선비문화의 소양 위에 서 있던 기업인이었다.
어려서 배운 논어를 기반으로 행동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몸가짐에 선비문화와 엄격함이 배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경학부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고 사실 경영인으로서 이병철의 일생은
신기술을 도입해 새로운 기업을 일으킨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당, 모직을 거쳐 비료, 전기전자,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그는 경영과 기술 두 문제를 놓고 평생을 싸워왔다.
이병철은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더 좋은 품질을, 더 싸게,
그리고 남보다 앞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삼성종합기술원은 한국 전자산업기술을 선도하고
그의 유언과도 같은 “기술은 돈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는 한국 기술의 메카가 되었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보보시도장(步步時道場)이란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이라는 뜻으로
이병철이 자주 인용하던 구절이다.
1987년 9월말 서울대학병원 내과의 서정돈 교수는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이병철의 자택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 회장은 서교수에게 와주어 고맙다며 웃음을 띄었다.
한평생 제일주의와 완벽주의로 일관해온 대기업 총수답지 않게
표정이 온화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10월 17일 이회장은 병중에도 한국빌딩 준공식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 참석이었다.
10월 20일 이병철은 안양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층 창가에 앉아 잔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이병철은 직원들에게 골프화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프로골퍼 이강선과 함께 카트를 타고 1번 홀로 나갔다.
1번 홀에 선 이병철의 첫 번째 티샷은 헛스윙이었고
두 번째 티샷도 겨우 10미터 정도 굴러갔다.
그러나 세건트 샷지점에서부터는 평상시처럼 플레이했다.
3번 홀에 이르자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못내 아쉬워하는 이병철의 마음을 읽고 주변사람들이
카트와 승용차 헤드라이트를 필드 쪽으로 밝혀주어 9번 홀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병철은 카트를 타고 10번 홀 그린을 세 바퀴나 돌아본 뒤 골프장을 떠났다.
이것이 이병철의 마지막 골프였다.
그리고 이병철은 20일 후인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거인의 77년 생애가 끝난 것이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라는 명구는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일관되게 흘렀던 좌우명이자
그의 행동주의적인 삶과 경영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가 행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가고 또 갔던 것이다.
이병철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철두철미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애국 기업가라 정의 내리고 싶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 모든 자료를 수집해 꼼꼼히 따져보는 철두철미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번 시작하면 무서운 추진력으로 끝장을 보는 의지력의 소유자이고
중대한 결정에 있어 국가의 발전을 염두에 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경영인이었기 때문이다.
무역업으로도 큰 돈을 벌고 있었던 때에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제조업을 시작한 일이나 73세의 나이에 반도체 사업을 추진한 점은
그가 범상한 경영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여기에 더해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리더였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