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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 5.

Joyfule 2007. 4. 17. 01:09


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 5. 

    이병철 
    삼성그룹의 창업자이다. 
    호는 호암(湖巖).
    1926년 서울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 중퇴했다. 
    193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가 
    1934년 중퇴한 후 귀국했다.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4. 외부적 상황이 기업가에게 미치는 영향  
외부적 상황의 중요성이 기업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아주 크다. 
물론 기업가에게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주민들이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한 것도 북한 체제 때문일 것이고, 
아프리카 일대의 기아 문제 역시 선진국들의 임시방편적인 대책과 
지도층의 부도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적 상황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쟁, 재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중동사태, 흉년으로 인한 물가 인플레, 정책의 변화로 인한 사회 변화 등 
예기치 않게 발생되는 상황을 뜻한다. 
기업가들은 이런 외부적 상황을 미리 알고있던 것처럼 대처할 수는 물론 불가능하다. 
기업가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왔을 때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병철은 그러한 면에서 최대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 독재 권력과의 관계 
돈과 정치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기업가들에게 권력이 필요한 것인지, 권력가들에게 자본이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독립적인 기업인은 보았어도 
독립적인 권력가는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해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1995년도쯤 중국에서 이건희 회장이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경제는 1류고 정치는 3류다.` 
이건희 회장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마디로 정치가 경제의 발목를 붙잡는다는 말이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군사정부는 불안정한 위치로 인해 민심을 잡고자 여러 가지 민심정책을 행하였는데, 
그 중 한가지가 부정 축재 혐의로 기업 매출액 1위부터 
11위까지 열한 명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했고, 그 첫 번째가 이병철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6월 24일 제국호텔에서 AP, UPI 등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빈곤 제거를 위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이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겠다.`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당시 군사 정부도 민심에 끌려서 부정 축재 혐의로 이병철을 지목한 것이지, 
근거가 있어서 지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귀국 후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나 자신의 의견을 얘기한다. 
기업인의 본분은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고 
확대투자를 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기업인을 활용해야한다. 
이 같은 이병철의 입장은 박정희의 의견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병철은 자신의 위기를 넘겼다. 
이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병철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서 밝히겠지만, 이병철은 일제시대, 2차 세계대전, 6.25 , 
4.19의거 속에서도 살아남은 경제인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이병철도 크게 후회한 사업이 있다. 한국 비료 사업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한국 비료하면 삼성이 사카린을 취급했던 범죄 행위로 기억을 한다.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조사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병철님의 장남 이맹희님의 의견을 참고로 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이병철은 비료 사업을 2 차례에 걸쳐 시도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는 1960년대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하에 비료 사업을 무난하게 추진 중이던 이병철은 
1960년 4.19의거 때문에 좌절을 맛보게 된다. 
물론 이때도 부정축재자로 몰려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한다. 
그렇게 첫 시도가 무산된 뒤, 비료사업을 접었다가 군사정부의 요구로 인해 
다시 비료 사업을 재개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힘든 난관을 극복한 뒤, 겨우 비료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무렵 
이병철은 `한비 밀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