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40년을 정리한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 “동아시아의 근대는 주자학이 성행하던 16∼17세기에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일본인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65) 교수.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서울대 도서관 4층에서 최루탄 냄새를 참아가며 조선시대의 ‘양안(量案·토지대장)’을 읽던 그는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있는가.”
그는 교토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60년대 말∼70년 대 초 한국사를 전공으로 택했다. 일본 학계에서 한국사에 관심 갖는 이는 거의 없던 때였다. 주임교수로부터 “한국사를 공부하는 건 좋지만 대학 취직은 단념하게”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는 운 좋게 마흔이 넘어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한국사 교수가 됐다. 이어 2002년 한국행을 결심한다. 마침 신설된 성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직 제의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내년 초에 정년을 맞는다.
미야지마 교수가 ‘한국사 연구 40년’을 정리하는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를 냈다. ‘가깝고도 먼’ 양국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성찰한다. 한국사에 대한 도전적 인식도 담겨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분쟁, 역시 그가 가장 풀고 싶어하는 문제다. 그는 동아시아 문명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역사갈등을 용해시키려 한다. “16~17세기 한국은 이미 근대적 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파격적 가설을 제기했다. “서구중심적인 역사인식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의 대립을 낳은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서구중심적 역사인식이란.
“고대-중세-근대로 나누는 시대구분이 전형적이다. 특히 ‘중세 봉건제’ 설정이 가장 심각하다. 봉건제는 중세 유럽에서만 있었다. 동아시아엔 유럽 같은 봉건제가 없었다.”
-일본의 봉건제는 학교에서 배우는데.
“일본 봉건제 얘기가 처음 나온 건 1905 ~1906년 러·일전쟁 때다. 러시아에 이기고 일등국이 됐다는 자부심에 그 근원을 따지다가 일본에서도 유럽처럼 봉건제가 있었기에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근대화에 일찍 성공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역사로부터 일본을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의 근거로 활용된 것인데, 그건 일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일본 학계에서 수용된 이론인가.
“아직 교과서에 반영은 안됐지만 지난 20년간 추이를 보면, 일본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일본 봉건제’ 용어를 쓰는 이는 점점 소수가 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가 16∼17세기에 시작됐다고 보는 근거는.
“조선시대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보면 서양에서의 부농형 지주 같은 토지귀족이 없었다. 특권적 토지소유가 없는 것이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그래서 근대화의 길도 달랐다. 그 배경엔 주자학이 있다. 중국 송나라는 주자학을 교재로 하여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선발했다. 신분제 해체라는 근대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으로 이어지는데, 유럽보다 훨씬 빨랐다.”
-한·일 역사분쟁을 어떻게 보나.
“일본의 침략을 인정하고 비판하는 일본인을 만나기는 쉽다. 그런데 침략 인정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조선과 청나라는 낙후해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지도가 필요했다는 시각이다. 이 같은 역사인식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이런 그릇된 인식과 침략으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라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됐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조선후기를 봉건제 해체기로 파악하는 시각도 문제다. 조만간 발표할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창비)에서 이런 문제를 자세히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