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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醫 華陀 (신의 화타)

Joyfule 2013. 4. 23. 09:23

 

 

神醫 華陀

 

 

편작(扁鵲)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의사로 꼽히는 화타(華佗, 혹은 華陀). 그는 후한말에 실존했던 인물로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마취제을 발명하여 치료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환자를 마취시켜 그동안 불가능에 가까웠던 외과적 수술을 시술한 그를 사람들은 신의(神醫)라 불렀다고 한다. 한말(漢末)의 전설적인 명의(名醫)로, 외과에 특히 뛰어나 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외과의 비조(鼻祖)'로 통한다. 그러나 외과뿐 아니라 내과·부인과·소아과·침구 등 의료 전반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치료법이 다양하면서도 처방이 간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화타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사이에 명의로 이름을 떨친 실존 인물이다. 그는 안휘성 출신으로, 의학 이외의 학문에도 아주 통달했다고 하며 특히 외과 수술의 명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타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마비산(麻沸散)'이라는 인도산 대마(大麻)로 만든 마취제를 사용하였다.

환자에게 이 약을 먹인 다음 재빨리 수술함으로써 환자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나서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로는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음이 틀림없으며, 그때 이미 외과의라는 의학의 전문 분야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공(周公)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 『주례(周禮)』의 「천관(天官)」 항목에는 식의(食醫 : 식이요법을 행하는 의사), 질의(疾醫 :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 양의(瘍醫 : 종기나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 수의(獸醫 : 동물을 치료하는 의사) 등으로 각종 병을 치료하는 분야가 구분되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주(周)는 기원전 11세기에 성립된 국가다. 무의(巫醫 : 질병을 치료하는 무당)가 번성하는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의학 지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중국의 과학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외과의로서 명성을 떨친 것말고도 화타는 연금술과 함께 도교 의학의 기본인 양생술의 창안자로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명성을 얻게 되었다.


 


화타가 5종류 동물의 동작을 본따 만들었다는 건강체조 '오금희'.
지금도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화타가 창안한 양생술은 대단히 쉬운 것이어서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병이나 상처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사고방식은 현대 의학에도 받아들여질 만큼 진보적인 것이었다. 화타는 자신의 양생술인 오금희(五禽戱)를 해서 백 살이 넘은 나이에도 불과 스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금희란 '도인(導引)'이라고도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건강 스트레찡 체조라고 할 수 있다. 화타 자신은 오금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체는 운동을 시켜주는 것이 좋다. 신체를 움직이면 몸속에서 곡물의 기가 사라지고 혈맥의 흐름이 좋아지며, 병이 없어진다. 옛날 선인(仙人=
신선)들은 '도인'이라는 것을 하여 신체를 잡아당기고 관절을 움직여서 노화를 막았다.

나는 내가 창안한 이 술법을 오금희라고 이름붙였다. 첫 번째는 호랑이, 두 번째는 사슴, 세 번째는 곰, 네 번째는 원숭이, 다섯 번째는 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오금(=다섯 동물)의 행동을 하나씩 따라서 실행하면 기가 맑아진다." (『후한서(後漢書)』1) 「방술전(方術傳)」 「화타전(華陀傳)」에서) 그리고 이 오금희를 하면 눈이나 귀까지도 확실히 좋아진다고 한다.

五禽戱 실행 방법

• 호희(虎戱) : 손발로 땅을 짚고 엎드려 앞으로 3회 뜀뛰기를 하고, 뒤로 1회 뜀뛰기를 한 다음 허리를 곧게 편다. 그리고 몸을 하늘을 향하게 하고 누운 상태에서 같은 방법으로 뜀뛰기를 실시한다. 이 동작을 7회 반복한다.

• 녹희(鹿戱) : 손발로 땅을 짚고 엎드려 목을 전방을 향해 곧게 편 다음, 왼쪽으로 3회 젖히고 다시 오른쪽으로 2회 젖힌다. 그런 다음 좌우 다리를 3회씩 구부렸다 편다.

• 웅희(熊戱) : 누워서 무릎을 세워 양손으로 붙잡은 상태에서 고개를 들어 좌우로 7회씩 돌리고 나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런 다음 팔다리를 펴고 편안히 몸을 눕힌다.

• 원희(猿戱) : 철봉 같은 것을 붙잡고 팔을 뻗었다 오므렸다 하기를 17회 반복한다. 그리고 두 다리를 대에 걸쳐 거꾸로 매달린 다음 한 다리만 빼고, 그러고 나서 반대편 다리도 같은 방법으로 일곱 번씩 번갈아 매달린다. 마지막으로 양손으로 대를 붙잡고 7회 팔을 뻗었다 오므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 조희(鳥戱) : 두 팔을 밑으로 내리고, 한쪽 다리를 새의 꼬리처럼 뒤로 들면서 팔을 앞으로 힘껏 뻗는다. 이 동작을 7회 반복한다. 그런 다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손으로 발뒤꿈치를 잡아당겼다 놓은 후 팔꿈치를 구부렸다 펴는 동작을 7회 실시한다.

1973년 말,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라는 한대(漢代)의 고분에서 '도인도(導引圖)'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인들의 신체 단련법 중의 하나인 기공(氣功)이 이미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관우와 조조, 그리고 화타


화타의 출신 지역인 패국 초현(오늘날의 안휘성)의 위치.
오른쪽 그림은 화타가 관우를 치유하는 그림입니다


 

화타의 활약상은 많은 문헌에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삼국지』에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번성(樊城, 호북성)을 공격하다가 팔에 독화살을 맞고 낙마한 적이 있었다.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진지로 되돌아갔지만, 상처는 이미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이때 어디선가 한 사람의 의사가 나타나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바로 화타였다. 관우가 독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료를 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화타라면 천하가 다 아는 명의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을 위해 달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관우는 크게 기뻐했다. 화타는 재빨리 수술을 시작했는데, 그 방법이 무척이나 끔찍해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창백해졌지만, 관우의 안색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상처를 모두 치료하자 관우는 화타를 위해 연회를 열고 황금을 사례로 주었지만, 화타는 거절한 채 치료약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그후의 이야기도 있다. 관우의 숙적이었던 위(魏)의 조조는 낙양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궁전의 대들보로 사용하기 위해 거대한 배나무를자르려고 하자 도끼가 퉁겨져 나올 뿐 아예 날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두려움에 질린 병사는 조조에게 그런 사실을 보고했다.

조조는 거목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땅 주인 노인을 불렀다. 노인에 따르면, 그 나무는 신이 머무는 신목(神木)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고, 검을 꺼내들고 거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맑은 소리가 나며 거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두려움을 느낀 조조는 말을 달려 궁전으로 도망쳐왔다. 그리고 그날 밤, 꿈속에 배나무의 신이 나타나 조조에게 달려들었다.

조조는 너무나 놀라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내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명의는 모두 다 불렀지만 아무도 두통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 신하의 소개로 화타가 찾아왔다. 화타는 조조를 진찰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병은 외과 수술을 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소이다."

조조는 화타가 관우를 존경할 뿐 아니라 그를 치료해 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타가 수술을 핑계삼아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살아서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깨달은 화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의학 이론을 정리한 책을 써서 옥문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주었다. 화타가 죽은 후, 옥졸은 화타의 책 때문에 자신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만 그 책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현재 화타는 의사의 수호신으로, 의사나 의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숭배되고 있다.

 


섬서성에 있는 화타의 묘비. 화타와 가깝게 지냈던 화산의 도사가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는데, 현재 무덤은 사라지고 이 비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화타의 무덤은 곳곳에
세워졌기에 이것이 진짜 화타의 묘비인지는 확인할수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