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박 신목사

성령의 권능은 폭발적이지 않다.

Joyfule 2018. 6. 26. 09:06



성령의 권능은 폭발적이지 않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4-19)

드럼 통의 비밀

화공 약품 회사에선 강력 펌프를 사용해 큰 드럼 통 속의 오염 물질을 빨아내는 작업을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일은 펌프의 힘을 조절해 통 속의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너무 공기를 많이 빼내면 통 바깥의 압력이 통 안쪽 보다 높아져 통이 찌그러지고 그 반대로 하면 통이 터진다. 안과 밖의 압력을 똑 같게 맞추어야 드럼 통에 손상이 안 가고 속에 있는 오염 물질만 빼낼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속 사람의 능력이 최소한 외부의 죄악과 사단이 유혹하고 방해하는 힘과 최소한 같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리 의지력이 강한 자라도 혼자의 힘으로 그럴 수 있는 자는 없다. 사단은 인간보다 훨씬 세다. 인간 내부의 압력은 외부보다  항상 낮기 때문에 그 싸움은 찌그러지는 모습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구원이 이뤄지기 전, 죄악에 찌든 인간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는 성령으로 인치시고 또 신자 속에 내주(內住)케 하셨다. 외부 압력에 대항할 신자 내부의 저항력을 성령님이 키우고 뒷받침 해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구원을 얻고 난 이후의 신자가 매일 구해야 할 것은 이전 불신자 시절과는 달라진다. 자기의 의지력을 신장(伸長)하여 스스로 세상을 이기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다. 오직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혼자서는 세상과 사단의 시험과 궤휼을 감당하기 힘들기에 항상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계시게 해야 한다. 속의 저항력이 작아지면 신자도 별 수 없이 찌그러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내부의 저항력이 너무 커지면 어떻게 될까? 두말 할 것 없이 신자도 폭발하고 만다. 아니 성령이 속에서 충만하면 신자로선 너무나 좋은 일인데 어떻게 폭발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신자가 간구하는 성령 충만은 너무 세어서도 안 되고 너무 약해도 안되며 밖의 압력에 적당하게(?) 맞추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폭발적인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에 관해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뭔가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일도 그렇게 진척될 것이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불의 혀 같이 성령이 강림하니까 그곳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이 동시에 방언의 은사를 받고, 삼천 명이 그날로 회개하고, 그 이후 사도들이 기도하면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것 같은 이적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능력은 분명 폭발적이다. 이 폭발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으로선 도저히 막을 수 없으며, 나아가 세상과 사단의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꼭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이루어진 일 자체가 화끈하고 감동적이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

물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같은 경우도 있다. 특별히 예수님이  전혀 소개 되지  않은 오지에서 처음 복음을 증거할 때는 그러하다. 초대 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복음을 접하는 곳에선 예수님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면 얼마나 큰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지 눈으로 보여 주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성령이 신자를 통해 역사하는 과정과 결과는 폭발적인 것과는 오히려 정 반대다. 하나님은 어떤 장애가 있어도 당신이 목표하신 결과는 반드시 이뤄내지만, 그것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각 개인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 말이다.

이들 열매 가운데 초자연적인 능력이 가시적,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는가? 성령님은 당신만의 은혜와 권능으로 신자의 내면과 그들이 모여 서로 섬기고 나누는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 신자가 주님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 주위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비취게 한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역사만 한다.

그것도 신자가 성급히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오직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만 한다.  그래서 항상 그 역사는 서서히 진행된다. 하루에 한 걸음씩 만 인도하여 조금씩 변화시킨다. ‘오래 참음’과 ‘충성’과 ‘절제’라는 열매의 성격이 바로 그렇지 아니한가? 아니 나머지 모든 열매도  순간적으로 급하게 이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지 않는가?

성령 충만의 강도를 낮추어라  

그럼에도 신자들은 자기 속의 압력을 높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끌어 올려져야 하고 환난이나 시험이 닥칠 때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저 부흥회, 기도원, 영적 각성, 찬양과 경배 집회를 찾아 방황한다. 더 강력한 파워를 더 값싸고 빨리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찾아 쏘다니기 일쑤다.

그런 집회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히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권능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때에는 압력이 너무 낮아 있던 신자의 내부가 갑자기 압력이 높아져선 얻을 수 있는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많다. 은혜 받는 것도 집회에 참여 할 그 당시 뿐이다. 집회가 끝나면 풍선에 바람이 빠져나가듯이 순식간에 성령의 능력은 줄어들고 집회에 참가하기 전보다 상태는 더 나빠진다. 드럼 통이 터진 셈이다.

신자는 외부의 압력에 견딜만한 성령의 충만만 구해도 된다. 이 말이 절대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무시하여 약하게 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외부의 어떠한 죄악과 악한 세력에도 충분히 견딜만한 성령 충만을 이룬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정말 솔직히 되돌아 보면 오히려 참으로 두려운 말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외부의 시험과 유혹에 지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승리한다는 뜻이다. 사단과 성령의 싸움에 휴전을 하거나 무승부인 채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폭발적이다. 인간의 눈에는 잘 안 보이고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오히려 의심과 불만만 불러 일으킬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이뤄나가고 계시며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내기에 폭발적이다. 효과가 단번에 확 나타나면 신자가 손을 놓고 기적만 바라든지 아니면 뭔가 자신이 잘해서 그런 결과를 얻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성령은 어지간해선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드럼 통에서 오염 물질을 빼낼 때는 서서히 항상 압력을 균등하게 조절하며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압력의 차이가 나면 어딘가에 잘못이 생긴다. 신자가 성령의 충만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부의 저항력을 외부에 맞추어 견딜만한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매일 매 순간 계속해서 구하는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신자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이미 성령의 전이 되어 있다. 외부의 압력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이 바로 신자의 속 사람 안에 좌정하고 계신다. 성령의 능력을 순간적으로 대박 터지듯이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매일 똑 같이 조금씩 기도하고 말씀 보며 하나님을 묵상하고 찬양하기만 하면 된다.

신자가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이 그 환난에서 안 망할 정도로 구원은 해주신다. 그것도 벼랑 끝에 다다라 신자가 완전히 항복을 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말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벼락치기로 신자에게 성령이 갑자기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신자가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길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나가 얼마가 되었든 그것으로 자기 속을 채우는 길 외에는 절대 없다.

바울 사도가 육체는 일을 하고 성령은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했다. 일이란 인간의 순간적 일시적 노력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계절들이 있다. 씨를 뿌리고 물과 비료를 주고 해충을 막고 추수하여 거두어 들이는 일 중에 하나라도 생략하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대신에 그런 계절들을 거치고 나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 그래서 “이 같은 것은 금지할 법이 없다”(갈5:23)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신자가 자신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점검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방언, 신유, 축귀 등의 은사가 얼마나 나타났는가를 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봉사를 얼마나 성실히 했고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따지는 것도 아니다. 매일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아침에 잠시 기도하고 말씀 보지 않았더니 오늘 하루는 뭔가 생기가 빠지고 기쁨과 평안이 없었다는 고백이 있는가를 보면 안다. 아니면 말씀과 기도로 아침을 시작하면서 오늘 하루는 정말 넉넉히 승리하는 축복의 날이 될 것 같은 확신이 생겼는가? 현실의 형통과는 상관 없이 영혼에 안식이 있었는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 세기와 기대치를 낮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큰 능력을 구하지 말고 오늘도 내 앞에 닥치는 죄악과 흑암의 세력을 담담하게 맞설 수 있는 분량 만큼만 구해라. 신자가 매일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 일은 하나님 당신이 책임을 져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당신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니 그 준비만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 것은 매일 쉬지 말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삶의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주님의 은혜와 권능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조금씩 자기 속에 쌓아가는 만큼만 성령은 충만해진다. 성령 충만에 천재나 거인은 절대 없다. 성령님 그분이 천재나 거인이지 인간이 그렇지 않지 않는가?

12/8/2005





꼭 연단을 거쳐야만 성장하는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 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84:5,6)



복숭아보다 더 귀한 인간

복숭아 과수원을 경영하는 한 젊은 신자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 통보 없이 교회에 결석하기 시작했다. 담임 목사가 심방을 가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복숭아 수확철에 갑자기 서리가 내려 올해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복숭아가 썩도록 내버려 둘만큼 저에게 관심이 없는 하나님에게 예배드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제는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

그래서 목사님이 진지하게 권면했다. “하나님은 복숭아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신다. 그분은 때 이르게 서리가 내리면 복숭아가 썩는다는 것을 잘 아실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서리가 내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도 아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복숭아를 잘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당신을 훌륭하게 성장시키려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시련도 허락하신 것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몇 번씩은 겪었던 혹은 겪었을 뻔한 일이며 또 그럴 때마다 목사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권면의 말씀이다. 한 마디로 신자는 복숭아보다 더 귀하기에 하나님은 연단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거치는 가장 전형적인 시험이며 또 그에 정확하게 맞는 성경적 해답이다. 오히려 너무 도식적이라 이제는 신자들이 목사가 어떤 말로 위로할 것인지 미리 알아 맞출 수 있을 정도다.

말하자면 신자들은 그런 시험에 들고 있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고 목사의 권면이 정답인 것에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도 파악하고 그 정답도 나왔다면 그 시험에서 바로 빠져 나와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해야 하는데도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닌가?

물론 사람이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만으로 당장 행동에 쉽게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벌써 세상은 낙원으로 변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도 이미 하나님에게 품었던 서운한 감정이 해결되지 않았고, 게을러지려는 습성도 있고, 여전히 하나님과 반대편을 향하려는 죄악 된 본성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으로만 신자가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도를 병행해 성령의 씻음과 치유의 간섭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주 믿음이 좋아 보이는 신자도 때에 따라 기도할 의욕과 힘마저 나지 않을 수 있다. 단순히 열심이나 의지력의 부족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여전히 신자에게는 풀리지 않는 마지막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꼭 연단을 통해서만 신자를 성숙시키려 하시는가? 그 방법 외에 신자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얼마든지 스스로 잘 할 수 있는데…”

욥이 아무 죄 없이 고통에 처해졌을 때에 하나님께 끝까지 그 이유라도 좀 가르쳐달라고 떼를 쓴 것과 동일한 의문과 불만이 오늘 날 우리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한 머리로는 하나님이 결국은 나에게 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려 이런 힘든 일을 겪게 하는가 보다 인정은 하면서도 가슴과 몸은 쉽게 따라 나서지 않게 된다.

신앙의 본질

신앙이란 인간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더 얻어내려는 싸움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인간더러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게 하려는 그분의 끊임 없는 간섭이다. 신앙의 과정도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적 주권 하에 있다. 그래서 그분의 간섭을 감사함으로 얼마나 잘 받느냐가 신앙이지 내가 능동적으로 얼마나 잘 믿는냐는 그분의 은혜를 받고 난 후의 온당한 반응일 뿐이다.  

복숭아 농장 주인은 복숭아보다 자기를 몰라 주는 것 같은 하나님에게 마음이 상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기대나 예상보다 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에게 한 권면은 “당신에 대한 관심은 복숭아에 대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어려운 일도 다 당신을 사랑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정답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로선 왜 꼭 그런 방법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안 풀린 것이다. 솔직히 하나님이 복숭아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이야기 아닌가? 천지를 인간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니까 더 사랑한다면 더 사랑한 표시가 나타나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니까 불만이다.

그래서 대다수 신자가 평생을 붙들고 있는, 사실은 허비하고 있는 신앙의 싸움은 이것이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신다면서요.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저 또한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조금만 더 저에게 관심을 나타내 보여주면 안 됩니까? 그럼 저도 정말 흔들림 없이 어떤 경우도 더 사랑할 텐데요. 관심을 더 나타내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고통을 주시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제 사랑마저 흔들리지 않습니까?”  

신앙이 인간이 하나님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싸움이라고 해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자, 목사, 선교사가 되어 당신의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에 대해 딱 한 가지만을 제대로 알아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진리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조금이라도 알아 나가는 것, 아니 그분의 품 안에 있는 것만이라도 바로 선의 근본이며 나아가 인간이 선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선(善)”을 도덕적으로 착한 일로만 제한해선 안 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좋은 것, 즉 기쁨, 자유, 평안, 위로, 평강, 능력, 행복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이다. 그 중에는 도덕적인 선과 나아가 현실적 축복도 당연히 포함된다. 세상만사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 하신 일 모두가 선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아나가기 위해 매일매일 그분 앞으로 한발자국씩 다가가야 한다. 그분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왜 나에게 더 관심을 안 가져주느냐는 문제가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선 절대로 그 사랑을 잴 수조차 없다.  

관심의 크기를 재려면 최소한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있고 그것도 어느 면으로나 유용할 정도의 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잴 수 있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거나 있어도 쥐꼬리만큼도 안 될 것 같으면 재어볼 엄두조차 생기지 않는다. 연애할 때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얼마나 좋아할까를 자꾸 재어보려 들지만,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거나 보아도 건성으로 쳐다본다면 그 크기를 재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그저 어떡하든 그의 눈길에 한 번이라도 들어 보려고 애를 쓸 뿐이다.  

삶이 매일 똑 같다면?

한번 가정해보라. 만약 인생살이가 평안하든 고되든 상관 없이 매일 똑 같다면 과연 인간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자연 재해가 없이 날씨가 365일 평탄하여서 죄도 없이 돌발적이고도 억울해 보이는 죽음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찾겠는가?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번갈아 주시면서 풍년과 흉년을 그분의 주권으로만 조정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 힘 만으로 살 수 없으며 이 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신자는 이미 하나님을 찾았고 믿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자 완전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완전하며 선하다”라는 진리를 확실히 붙들고 있지 않다. 하나님으로선 아직도 당신에 대한 관심을 더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품성 알아 맞추기 시험을 보아 그 점수를 올리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만 선이 오기 때문에 인간더러 언제 어디서나 더 크고 풍성한 선을 누리라는 것이다.

이 진리를 놓치면 솔직히 이 세상을 살아감에 신자만큼 억울한 자도 없다. 도저히 불공평해서 살지 못한다. 현실에선 손해  봐가며 성실하게 살았고 교회에선 정말 열심히 주님을 섬겼는데도 그러지 못한 악인이 더 형통하고 있다. 당장 눈에 닥친 현실과 하나님의 사랑간에 생긴 괴리를 메우지 못해 의심과 불평이 끊일 새 없다. 그 불만을 종교적 행사나 신념으로만 누르려 해선 오히려 속으로 골병이 도질 수도 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마저 오해 하게 된다. “제가 아무 자격이 되지 않았을 때에 오히려 그 반대일 때도 당신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저를 사랑했다면 왜 지금은 이렇게 힘들게만 하십니까? 무조건적이고 무한하신 긍휼은 어디에 갔습니까? 지금은 당신의 관심을 받아야 할만큼 어느 정도 조건과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절대 스스로는 의롭고 선해질 수 없기 때문이었지 않는가? 당신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오는 인간의 선은, 또 다시 선행 만이 아니라 참 행복을 추구하려는 모든 의로운 노력을 의미함, 어디까지나 인간적, 상대적 선으로 불완전할 뿐이다. 그래서 이제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선으로 인간을 이끄시겠다는 뜻이었다.

그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이 보일 반응은 오직 벌거벗고 엎드려 항복하는 길 뿐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에 대한 관심은 너무나 완벽해 단 한치의 오류, 조종, 가식, 위선이 없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당연히 지금까지 스스로 선을 추구하려 했던 모든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한 마디로 오직 하나님 만이 선하신 분임을 그래서 모든 선한 것이 오직 당신께로만 나온다는 것을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서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항복해 놓고는 왜 또 다시 그 항복을 수정 내지 철회하려는가?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거나 없다고 의심하고 불평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당신을 알게 해 주시고,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고, 우주의 주인을 감히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게 해주셨는데도 말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당신께서 성령님으로 신자의 속에 영원토록 좌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그래서 가장 큰 이유는 당신에게 더 관심을 가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분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따지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있는가 물을 자격과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이미 십자가의 예수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이유는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제대로 이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신자더러 그런 일도 하나님의 절대적 선임을 의심치 않을 믿음이 있는가부터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이 하신 일에는 악한 의도라고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는가를 따져 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방법 말고는 신자가 하나님에게 갖는 관심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테스트 해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겠는가?”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신자가 환난조차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는 절대적 선(善)임을 확신하기 전에는 환난은 끝까지 환난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시작한 것조차 아니다. 신자에겐 이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반면에 하나님이 언제나 완전한 선임을 확신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 환난이 신자의 행복이자 축복임을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비로소 환난이 소망으로 변하고 인내할 힘이 생기며, 나아가 환난 자체를 기뻐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 어떤 형편에서나 완전한 선이다라는 것에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눈물 골짜기를 통행할 때에, 아직 그 골짜기를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바로 그곳이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른 비가 비록 복숭아는 썩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자신은 더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 있음을 확신하여 환난 중에 찬양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영원무궁토록 신실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꾸 확인하는 것이다. 신자더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게 해 주시는 이도 그분이시다. 그런 사랑을 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하나님이  사랑을 더 많이 부어 주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1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