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 박시윤
무서리가 내린 들판은 싸늘하다. 살갗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소는 긴장을 한듯 뿔을 앞세운다. 씨실과 날실의 바람은 한데 얽히고설키어 소의 주변을 맴돈다. 본능인 듯 소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뿔을 앞세워 바람을 떠받는다. 뿔에 걸리는 것이 어디 바람뿐이었을까. 생의 인연들이 오롯이 뿔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소가 운다. 소의 눈은 젖어 있다. 모래판의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허공에 목을 빼고 한참 포효를 터뜨린다. 소의 육중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보인다. 산이 흔들리고 하늘이 깨어질 듯 웅장한 소리다. 오르고 싶은 곳에 대한 욕심과 패배에 대한 아픔이 뒤섞여 피를 토하듯 절망적인 소리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징의 소리가 이보다 클까. 챔피언을 거머쥐고 내뱉는 승리의 소리가 이보다 클까.
오래토록 한자리에서 소를 보고 있다. 소의 울음소리와 되새김질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내 속의 눌러둔 자존심들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의 울음소리에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도 도망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눈물이 빠지도록 코언저리에 고통을 주었던 고삐와, 어깨가 무너지도록 무겁게 지워지는 멍에는 나를 점점 삶 속에 옭아매고 있었다.
소는 살림밑천이라고 했던가. 4남매 중 셋째였던 나는 오로지 살림밑천이 되어야 한다고 숱하게 세뇌를 당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그 넓은 전답이 한순간에 남의 손에 넘어갔다. 대학을 고집하던 언니와 오빠는 내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이듬해 들어간 야간대학마저도 휴학으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 배움이 부족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는 너무도 쉽게 터득되었다. 잦은 야근과 휴일이 지속되면 될수록 나는 지쳐만 갔다.
가끔씩 엿보는 책 속에 펼쳐진 이상의 세계는 달콤했다. 횟수를 거듭하며 기웃거리던 세계로 도피하고 싶었다. 벗어놓은 허물의 수가 많아질수록 언어의 행과 행 사이에 나는 깊숙이 숨어들고 있었다. 또 다른 것을 위해 위장과 변신을 거듭하며, 언어는 나만의 유희를 즐기는 돌파구였다. 그래,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책의 장수가 두께를 더해갈 무렵 세상을 탐닉하는 시야도 넓어졌다. 문인이 되겠다는 꿈을 억누를 때마다 대학의 문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강렬했다. 나는 오로지 문학의 챔피언을 거머쥐는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더욱 자극적이게 현실의 문턱으로 고삐 질을 해대는 건 가족이었다.
빚더미에 앉은 가족 앞에 나는 철저하게 희생되어야 했다. 자존감과도 같았던 문학은 감히 엄두도 못 낼 한 자락 사치였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잠재우는 곳은 들판이었다. 현실의 냉정함을 원망하며 들판의 허공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이상을 벗어나 현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시는 문학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 어금니를 물고 뜨겁게 눈물을 삼켰다.
잘 다려진 비단처럼 구김살 없는 성품, 온화하게 쏟아놓은 말은 매번 나를 포장하며 현실 속으로 끌고 나갔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조건에도 못 본 척 눈감아주기도 했고, 속없는 말들로 남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핑계 같은 변명이 줄을 이었고, 숱한 염문 속에 혼자 빠져나갈 궁리로 골머리가 아팠다. 지겨웠다. 살아남기 위한 구질구질한 날들을 돌아보며 숨이 막혔다.
나는 냉정했다. 전답을 다 떨어 먹은 차디찬 문서처럼 가슴팍은 한순간도 여유롭지 못하고 상처와 흉터로 가득했다. 까슬한 기억들은 절대 지배자처럼 쉬이 떠날 줄 몰랐다. 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얼음의 모서리에 배여 아파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어금니를 물고 주먹을 쥐었다. 내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오롯이 자라나던 새하얀 뿔이 느껴졌다. 스스로가 키워온 집념과 자존심의 결정체였다. 내가 믿을 것은 오로지 뿔이었다. 욕망이 깊어질수록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더욱 더 현란하게 날뛰며 아우성을 쳤다. 아무에게나 뿔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뿔에 상처를 입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싸움은 예와 도를 몰랐다. 기술도 몰랐다. 각지고 바싹 건조된 세상은 사하라사막의 뜨거운 모래판과도 같았다.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싸움뿐이라고 믿었다. 세상은 모래판이 되었고 전투의 태세를 갖추고 하루하루 억척스럽게 밀고 나갔다. 싸움판에서의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거칠고 대범했다.
모래판 한가운데 두 마리 소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머리를 맞대고 오래토록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검붉은 등에 해가 스멀거린다. 커다란 눈에선 번개 같은 번뜩임이 보이고, 씰룩이는 콧구멍에선 불같은 김이 뿜어져 나온다. 뾰족하게 다듬은 뿔은 부딪고, 씩씩거리는 신음소리만이 모래판을 헤집고 다닐 뿐이다.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소의 자존심은 건조되어 예민하고 거칠었다.
드디어 싸움판의 고요가 깨지고 있다. 소들의 자존심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한마리의 소가 앞으로 나아가자 관중들의 함성도 뜨겁게 달아오른다. 소싸움 판의 물이 잔인하게 오르고 있다. 밀고 밀리는 순간마다 좁은 모래판 위로 먼지는 희뿌연 회오리바람이 되어 일어난다. 불붙은 소들의 자존심이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뿔에 상처를 입을 것도, 낼 것도 알면서 쉬이 물러설 줄 모른다. 머리를 박고 한동안 대치상태에 있기도 하고, 싸움에 지쳤는지 혀를 한 발이나 빼어내곤 거친 숨을 토해내기도 한다.
한참을 머리를 맞댄 힘 대결이 이어진다. 한 마리의 소가 맹수와 같은 울음으로 상대를 제아비한다. 퉁방울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막무가내로 밀어젖히는 괴력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상대편 소는 혀를 빼물고, 뒷배가 들쑥날쑥하더니 이내 똥, 오줌을 지린다. 결국 패배를 인정한 한 마리가 등을 돌린다. 날카로운 뿔에 찔려 피가 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혈투 속에 소는 그렇게 또 한 마리의 소를 쓰러뜨리고 있다. 소가 산이 무너질 듯 포효를 터트렸다. 나는 대리 만족을 느끼기라도 하듯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뿜어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승리를 알리는 징의 소리가 명쾌하게 모래판 위로 흩어졌다.
기쁨은 짧았다. 사람들이 떠난 모래판 위로 묽은 허무함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숙연해졌다. 싸움은 단순한 잔머리 대결이 아니었다. 싸움 속에 비수 같은 자존심이 살아 있었다. 오랜 되새김질 끝에 나오는, 그들만이 터득한 예와 도가 살아있었다.
가끔 일을 하다 보면 뿔따구가 확 치솟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이유 없이 한판 붙고 싶어진다. 그러나 소와 마주한 오늘 진정한 싸움은 한판의 힘자랑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되새김질과 자기 성찰의 끝에 비로소 얻어지는 결정체라는 것을 보았다. 순간순간 올려대는 꼬리질은 어두운 과거와 문명의 사치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자신에 대한 체벌일는지도 모른다.
예와 도를 모르고 덤빈 탓에 많은 사람들 앞에 사죄하며 무릎을 꿇었던 적이 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나를 추락시키고 몰살시키려 하였던가. 펜 한 자루가 유일한 벗이었던 지난날이 그리웠다.
오늘도 무서리가 내린 들판은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새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이 풀려있다. 온화하고 우직한 들판의 소로 돌아가고 싶다. 누가 지워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가 짊어진 멍에,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채찍이 아니었을까 되짚어 본다.
나는 다시 들판으로 나왔다. 봄볕이 자작이 내려앉을 무렵 소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가슴이 답답하면 어김없이 소를 보러 왔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까. 사물을 아름답게 짊어지고 묵묵히 길을 가는 소를 앞에 두고 있다. 싸움판의 환상을 그만 깨어볼까 한다. 속 깊이 잠재된 언어들을 밑천삼아 다시 언어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싶다. 비겁하지 아니하고, 스스로가 채찍질하며 고요히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소이고 싶다. 논과 밭을 맨발로 맨몸으로 헤집고 다니며 황금의 들녘을 고요히 거머쥘 아름다운 욕심을 품은 들판의 소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꾸어 보려고 한다. 소처럼 순하게 나의 길을 다시 가다듬어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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