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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근(宋昌根) 열정적이고 경건한 목회자

Joyfule 2009. 3. 5. 00:30

송창근(宋昌根) 열정적이고 경건한 목회자

송창근 [1898-1951. 1920년 피어슨 신학교 졸업]
장로교 목사. 조신신학교 교장 역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출생]

1. 피어슨 성경신학교 졸업. 남대문교회에서 목회시작

북쪽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몽새마을)에서 1898년 10월 5일에 태어났다. 부친은 송시택이요. 모친은 신봉암이고 그들 사이의 5남매중 장남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의 농가이며 보수성이 짙었으나 종숙되는 송시명이 일찍이 개화하여 향리에 북일학교라는 신학교를 세우고 기독교도 먼저 받아들여 그 고장의 처음 교회도 세운다. 송창근은 그의 영향을 받고 북일학교에서 공부하며 기독교에 접한다. 13세 되던 해에는 여섯살 위인 19세의 싱부 김재원과 구식 결혼을 하고 15세에 종숙의 권고로 만주에 건너가 명종중학교에 입학하며 여기서 당대의 거물 이동휘와 만난다. 이동휘는 송창근을 총애했으며 여기서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꿈을 키우기도 한다.상황의 어려움으로 이동휘가 시베리아로 떠나자 그를 따르려 했던 송창근은 목사가 되라는 이동휘의 당부를 새기며 귀향한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상경,1915년에는 중등교육과 신학 수업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 3월에 졸업한다.

이때 남대문교회 장로요 조사이던 함태영이 3.1운동과 연루,투옥되자 청년 송창근이 그 자리를 메우며 그에게 있어서의 첫목회를 시작한다. 주로 하는 일로 남대문교회가 뚝섬에 세운 전도소에 나가 활동했는데 이때 교인들에게 '독립운동가'노래를 유포시켰다는 죄목으로 일경에 투옥,역시 첫 옥고를 치른다.1920년8월 휴양겸 귀향했다가 함겸도 옹기금융조합 서기로 있던 김재준을 만나는데 이를 통해 김재준이 기독교와 신학에 접하는 한 계기가 된바. 그 사사로운 만남이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만다.

2. 미국에서 신학박사학위.

1923년 9월 3도일,한때 방황하다가 먼저 동양대학 문화학교에 입학산다. 1년 후에는 청산학원 대학 신학부 2학년에 편입하고 1926년 이를 졸업한다. 그동안 일본에 동경대학에 다니던 채필근과 뒤이어 청산학원으로 온 김재준과 깊이 교유한다. 일단 귀국한 송창근은 한국인 기독교 유지들이 중심이 된 기독교창문사 발행의 기독교 종합잡지인 <신생명>에 관여한다. 이는 전영택 목사가 주간인 잡지로 송창근이 신학적 문필적 기개를 펼친 첫 무대이다.

이어 도미 유학을 결행하는데 고학의 웅지 뒤에는 옥중 친우인 이용도 목사의 눈물어린 여비 보탬의 일화가 있다. 먼저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적을 두었다가 곧 프린스턴신학교로 옮기고 그곳에 1년 먼저 와 있던 한경직을 만난다. 뒤이어 찾은 김재준을 맞아 함께 동고동락한 이들 셋의 우정은 깊이를 더한다. 1928년 9월에는 펜실베니아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1930년에 신학석사가 되고, 1931년 마침내 콜로라도의 덴버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신학박사였으나 목사가 아닌 그는 귀국 후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으며 숭실에서도 가르친다. 진보신학을 했다는 이유로 평양신학교에서는 가르치지 못하고 다만 그 기관지 <신학지남>에 새로운 신학사상을 논문으로 발표하기 시작한다. 1932년 평양노회에서 시취,안수받고 한국 대표적 장로교회였던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된다. 이곳에는 조만식.김동원 장로 등 거물 민족지도자 교인들이 다수 있었다.

1936년 봄에는 산정현교회를 사임.부산으로 내려가[성빈학사]를 설립,사회사업에 몰두한다. 이때 김정준을 피택.<성빈>이라는 잡지를 내고 부산 일대에서 성서강좌를 통한 간접 목회에 큰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원이었던 그가 소위[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투옥되었고 4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39년도에 가석방되었다. 이때 그는 혹독한 고문과 심리적 갈등으로 쇠약해졌고,그 이후 일제 말기에 있어 종전과 같은 강직한 투쟁과 주체보다는 유연과 신축을 택하고 있다.

3. 조선신학교 설립 주체로 활동, 6.25와 더불어 납북.

이는 곧 강제의 '조선기독교단' 조직의 간부, 경상북도 도청의 촉탁 역임.신사참배의 용인 등을 통한 그의 일종의 변절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1939년 3월부터 시작된 한국인 자신의 신학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의 설립 주체가 이 일의 구체적 주도는 김재준이 뒤를 이었으나 발의와 계획, 진행의 에너지가 송창근에 의한 것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적산 재산의 불하, 학교의 인가, 내실 있는 신학교육의 향상 등에 골몰한다. 이때 한편으로 서울 동자동에 바울교회(현 성남교회)를 설립하고 신학자로서,신학교육가로서의 삶과 더불어 목회 실천의 일념을 버리지 않는다.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 파기선고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크게 고민하는 중 1950년 6.25사변이 일고, 교회와 학교를 지키려던 그는 공산당에 이끌리어 납북되었다. 그후 정확한 생사는 알 길이 없으나 1962년 발표의 [죽음의 세월]에 의하면 병약하던 송창근은 1951년 7월경 평남 대동군 문성리에서 쓸쓸한 임종을 맞았다고 전한다. 부인 김재원과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는데 장남 연규는 의사이다.

4.열정적이고 경건한 목회를 중시

신학자 송창근은 곧 목회자 송창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신학자와 목회자를 구별한다. 신학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 하고, 신앙이 좋다는 설교가들은 신학을 무시한다. 그러나 송창근 그에게는 이 둘이 결코 나뉠 수 없는 한 존재였다.

목회가 송창근의 열정적 에너지원임은 그가 누누히 강조하던 '감격의 생활'속에 나타나 있다. "감격이 없는 인생 생활에는 창조적 생명이 없다.. 감격성을 떠난 개인이 되는데 없고 민족이 되는데 없습니다..." 남대교회의 조사로부터 시작된 그의 목회는 신학 수업과 성빈학사,조선신학교의 운영이라는 간간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귀착점처럼 꾸준히 지속되었다. 곧 그의 신학은 목회적 실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 송창근은 우선 열정적이고 경건을 중시했다. 목회의 대도를 놓치지 않았고 개인의 안주에 초연하였다. 산정현교회에서 본격적인 목회를 행할 때 전민족적으로 저명한 장로들이 버틴 가운데서도 자세의 흐터러짐이 없었고 교인들의 신앙 기강을 엄격히 훈련시켰다.

그는 신앙과 신학을 삶으로 산 목회자이고 삶과 실천을 바탕에 둔 진실된 설교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곧 신학이요 신학적 이론은 곧 열정적 설교로써 표현되었다. 이러한 송창근의 목회 세계는 구체적으로는 두가지의 모습으로 간추려진다.

첫째는 경건의 생활화와 그 훈련이다. 그는 일생을 두고 성자 프란시스를 흠모했다. 학창시절에는 물론 목회생활시에도 근처 머리맡에 그의 사진을 붙여두고 청빈과 경건의 신앙정신을 본받아 실천했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목회자마다 교인들을 경건과 엄계로 지도했다.

한편 관심과 사랑,유머와 재치를 지닌 훈련법도 놓치지 않았다.

둘째는 제자 육성의 목회이다. 그는 일생을 두고 사람을 만나고 길러내고 감화를 주어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양육하는 일이 주된 일이 되고 있다. 교육가로서 학교의 틀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진 것만 아니라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그리고 각 목회 현장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동지적 우애로 만난 김재준을 필두로 유학시절 산정현교회와 숭실시절, 성빈학사시절,김천 황금정시절,조선신학교와 성남교회시절 끊임없는 제자 육성의 목회길을 일관하였다.

신앙과 신학의 실천을 만남과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려 했던 송창근의 목회세계는 먼저 자신 스스로의 경건과 청빈의 모본을 보이고 이로써 교인을 훈련하며, 부단한 신앙적 인격적 감화의 계기를 통해 만난 이들은 변화시켜 가는 것으로 집약되고 있다.

5. 나눔을 실천한 목회자

"있는 가운데서 없게 하고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우리는 분명히 죽음을 확인하고 포기하고 돌아설 때 당신께서는 살았다 하며 죽은 자가 무덤을 깨고 일어나는 당신의 힘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는 일생을 두고 송창근이 즐겨하던 기도의 단골 대목이다. 여기에는 그의 신앙의 농축된 주제가 있다. 삶의 순간순간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생사의 결단과 대결의 자세로 임하면서 역동적으로 역사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했던 고백의 기도이다.

송창근의 성품은 그의 목회 행적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봉급의 반은 구제금이었고, 심방이란 대접을 받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그 집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들고 나서는 길이었다. 이것은 공동체를 모아 단합시키고 개개인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을 주고 감화시키는 뚜렷한 힘이었다.

6. 실천되는 신학과 신앙을 위해 헌신

송창근의 삶과 목회는 역설적 패러독스가 조화되어 있다. 그자신 선구적 신학자이었으면서도 신학이 신학에 의한 존재 이유를 거부하고,실천되는 신학과 신앙을 몸소 살았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성과 실천성은 갈등을 버리고 이론과 실천, 진리와 은혜,말씀을 들음과 행함, 엄격과 자애, 물과 불,성과 속,높음과 낮음, 지성소와 말구유가 그의 목회 신학 안에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통로 속에서 은총으로 구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