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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강은영 목사 (감리교)

Joyfule 2009. 6. 7. 00:11

순교자 강은영 목사  (감리교)

 

강은영 목사(1905-1950)


강은영은 1905년 음력으로 2월 30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읍 구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다가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 성서학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 2학년 때 부터 원효로에 교회를 개척 성공적인 목회에 돌입했다. 그의 힘있는 설교는 성령의 은혜가 넘치고 이웃교회에서 부흥회 인도를 부탁할 정도로 학생부흥사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개척한 교회를 후배목사에게 일임하고 해주로 내려가 해주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다가 1941년 평양신학교에 편입했으나 김인준교장 등 교수 전원이 신사참배 거부로 페교조치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해주제일교회를 떠나 평안남도 강서로 내려가 대안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장로교가 아닌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암리교회, 신덕교회, 온정리교회, 삼화읍교회를 전전하며 목회를 했다. 그가 여러교회를 전전한 이유는 신사참배강요에 있었다. 신사참배에 타협처인 감리교회의 태도와는 달리 강은영목사는 교단의 허락한 문제였지만 십계명에서 지시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강은영목사는 일제하에서 경찰서 유치장을 여러차례 들락거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기독교도연맹의 음모로 공산당 내무서원에 의해 철저하게 협박당했다.

"동무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까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갈지 한번 생각해 보았소?" "어느 귀신은 어느 귀신이겠소 예수귀신이겠지 오히려 나는 그 귀신에 사로잡히기를 바라는 바요." 그가 신암리교회 목회할 때 장터에가서 사과상자를 연단으로 하고 복음을 증거했다. 그는 앉으면 기도 서면 전도한다는 목표가 생활화 되었다.

 

새벽기도는 3시부터 교회 강단에 나가 먼동이 트는 7시까지 되어서야 일어났고 평일 낮에는 산기도에 올라가 깊은 기도에 잠기기도 했다. 강목사는 해방 후 전국을 돌아치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부흥회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몰려와 회심하는 특징을 나타냈다. 해박한 한문지식과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달변때문에 많은 젊은 청년들이 몰려와 회심을 하는 것이었다. 글씨도 미문이어서 부흥회하는 교회에 족자를 남기기도 했고 교회 간판이 시원치 않으면 송판을 구해다가 친히 써서 달아주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간미를 보여주었다.

그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삼화읍교회에 시무시에 1949년 새벽송 도는 청년들을 안면방해로 구금시켰을 때에 내무서장을 찾아가서 내무서장을 쏘아보며 비수같은 항의를 쏟아놓았다. "진리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을 잡아 가둔다면 이 땅 위에는 비진리의 어둠의 세력만 판치라는 소립니까? 하나님의 무서운 징치가 있을 것이라" 항의했다.

 

강목사의 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고 있었고 그의 항의가 주효했던지 모두 풀려나와 크리스마스 예배를 은혜롭게 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강목사에 대한 감시는 이때부터 본격화 되어 내무서원이 주택에 상주했다. 성도들 집에 피해 있으라는 교인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이나 수요일이면 교회에 나타나 예배를 인도했다.

 

 1950년 6월 24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오는 강목사를 두사람의 내무서원이 팔을 끼어 끌려가 용문동 굴속에 몰아넣고 강제 노역에 처했다. 4개월간 소식 한자 없던 강목사가 8월 14일에 정치보위부 한교선과 사택에 나타나 "여보 때가 되었오 겨울 내복을 주시요" 하고 부억에 따라 들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며 사모에게 밥한 그릇을 차려먹고 "여보 갱도안은 너무 추우니 오바를 주시오"하고 겨울 오바를 꺼내다 주는 아내를 애잔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한교선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북진이 계속되고 사화읍이 국군통치하에 들었을때 한교선이 잡혔다. 그는 피모르 장거리 숲속에 죽여 매장한 것을 실토했다. 당시 강은영 목사를 위시하여 장로교목사 등 탄부감리교회 남전도사 등 14명이 순교했다. 교회는 이들을 모두 교회 과수원에 가매장을 했다. 후예로는 사모 윤성란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강신일목사와 강신평목사가 그들이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